<미당문학회 (2020. 6. 28. 全州) 특강 원고>
1998년, 내 일기장 속의 며칠
정숙자
1998년 1월 13일
미당 선생님 댁 방문하다. <세밑>
1998년. 2월 28일
모 잡지사의 부탁으로 선생님 댁 다시 방문, 다음 호에 내외분 회혼일을 기념하여 표지 사진 촬영 날짜와 시간을 잡다.
1998년 3월 14일
앞서 약속한 모 잡지사 팀과 선생님 댁을 찾아갔으나, 잡지사 팀의 사정으로 50분 늦게 도착. 그로 인해 끝내 대문이 안 열려 뵙지도 못하고 돌아오다.
1998년 3월 22일
회혼식 자리에 갔다가 선생님의 믹소포비아(Mixophobia) 증세에 큰 충격을 받음. 날 보고 FBI의 스파이라고, 당신을 죽이려 한다고… 모 잡지사 아무개와 짜고 네년이 나를 잡아가려 해… 네년 뒤에 안기부의 졸개들이 줄줄이 따라오는 게 보인다고, 나를 어느 산속으로 끌고 가 돌로 쳐 죽이고… 신문에는 “미당은 잘못 살았다”고 낼 거라고….
◭ 사진을 찍기 위해, 인터뷰에 응하기 위해 의복을 갖추고 정자세로 앉아 시시각각 50분 동안 기다렸을 상황을 유추해봅니다. 더욱이 그 무렵은 사회적으로 미당-친일 논란이 불붙은 시기였습니다. 5분 늦은 바와는 사정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점점, 점점…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과거와 현재가 뒤엉키며 누적된 강박이 공포로 바뀌었던 것이지요. 믹소포비아 상태, 즉-뒤섞임으로 인한 공포증이 한꺼번에 솟구쳤으리라 추정합니다. 혹시나 평소에도 그러지 않았을까, 의심해 보는 건 오산이에요.
선생님은 산 이름 1000개 외우기를 거뜬히 하실 정도였으니까요. 언젠가는 맞는지 틀리는지 산 이름 적힌 종이를 제가 들고 있기도 했으니까요. 지금도 음성이 들릴 것만 같습니다. “이거 들고 있어 봐. 외워볼 테니, 혹시 틀리는지 잘 봐.” 맞힐 때마다 특유의 웃음과 함께 소년처럼 기뻐하셨지요. 산 이름뿐 아니라 높이까지도 맞히셨으니까요. 손수 산의 높이 순으로 베껴놓은 종이였습니다. “내가 지도랑 놓고 다 찾아서 쓴 거야.” 선생님은 그 기억력 강화법을 퍽 득의得意로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추억의 날은 1998년 3월 14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도 한 번 방문했으나 여전히 같은 증세를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죄송스러운 마음에 방문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날 저는 깨달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저를 이전의 사람으로는 인식할 수 없을 만큼 내상內傷을 입으셨다는 것을! 더 이상의 방문은 선생님을 괴롭힐 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날 이후 다시 찾아뵙지 못하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사람의 인연이 어찌 이리 허무하단 말입니까. 다소나마 은혜를 갚지도 못했는데.
1998년 3월 31일
선생님께 전화했으나 “안 받으시겠다”는 전언
…그리고, 그리고는…
2000년 10월 12일
사모님(방옥숙 여사) 조문
2000년 12월 24일
선생님 타계
2000년. 12월 26일
서울 강남 성모병원 영안실 다녀옴
未堂//그의 가방은 무거웠다/ 그는,/ 비척거렸다// 그의 가방 안에는/ 바위 같은/ 돌다리 같은/ 노래 몇 점 들어 있었다/ (일기장 속의 헌시, 8 : 20)
2000년 12월 27일
서울 강남 성모병원 영안실 다녀옴
2000년 12월 28일
발인, 문인장, 전북 고창 질마재에 다녀오다.
장지에서, KBS 전주 방송국 기자 한 분이 다가와 자기소개를 하며 즉각 인터뷰 요청. 선생님의 삶에 대한 질문에 “선생님의 가방은 좀 더 무거웠던 것 같습니다.”라고 답했다. 무의식은 의식보다 한 걸음 앞서 현실을 지각知覺하는가 보다. 이틀 전 일기장에 적어둔 <헌시>가 아니었다면 어떤 주어를 더듬었을까.
◭ 벌써 20년이 지났습니다. 여기 소환한 며칠의 짧은 일기는 오늘 처음 공개하는 내용입니다. 그동안 미당 선생님 관련 원고청탁은 몇 번 받은 적이 있지만, 이 이야기만은 깊이깊이 묻어 두고자 했습니다. 혹시라도 선생님께 해害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조심스러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비화를 발표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이 글의 발표 지면이 『미당문학』인 까닭이고, 필자도 내년이면 나이가 70이므로, 우리 역사의 아픔 속에서 미당의 고통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헤아려보기 위함입니다.
저는 1988년 『문학정신』 12월호에 등단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창간한 월간지였는데, 그해 12월호를 끝으로 다른 이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폐간되었고, 그로부터 몇 년 후 또 다른 분이 『문학정신』이라는 제호로 복간했지만, 역시 얼마 못 가 막을 내렸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의 품에서 선생님 추천으로 등단한 시인은 필자와 함께 등단한 김수경 시인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 행운으로 필자는 등단하자마자 모지母紙 없는 상태로 디아스포라(diaspora)의 길을 걸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여러분께 드릴 말씀의 본론에 해당하는 1998년 3월 22일, 저의 일기를 봐주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아파 제가 다시 소리 내어 읽을 수는 없겠습니다. 다만 기록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니, 여러분의 마음이 그러할 때 애정을 갖고 다시 펴 보셨으면 합니다. 그날 선생님의 긴장된 눈빛과 말씨와 전체적 분위기를 어찌 또 꺼낼 수 있겠습니까. 오직 선생님 가슴에 얼마나 큰 바윗덩어리가 얹혀 있었던가를, 어떤 회한과 침묵이 선생님을 지배하고 있었던가를 고쳐- 고쳐- 돌아봐 주셨으면, 하고 소망합니다.
1910년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되었고 선생님은 1915년에 태어났습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 겨우 4살이었던 거죠. 일제는 국어 말살정책과 창씨개명 등 온갖 탄압을 감행했지만, 1941년에 첫 시집 『화사집』이 나왔으며, 1945년에 해방을 맞았습니다. 그 시대적 배경을 짚어가다 보면 깊은 상념에 잠기게 됩니다. ‘친일’ 문제가 스칠 때마다 과過뿐 아니라 공功도 함께 논의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김동수 선생님과 미당문학회 여러분, 그리고 미당을 아끼는 모든 분께 진정어린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p. 16-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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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당문학』 2021-상반기호 <특집 1/ 미당문학회_하계수련회 특강 원고> 전문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뿌리 깊은 달』등, 산문집 『밝은음자리표』 『행복음자리표』, 질마재문학상 · 동국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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