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이태수_신성 추구와 전복적 상상력(발췌)/ 세한도에 덧칠하다 : 김건희

검지 정숙자 2021. 2. 9. 23:11

 

    세한도에 덧칠하다

 

    김건희

 

 

  추위가 풍경을 뭉개도

  새들의 몸은 문풍지처럼 가벼웠다

 

  지난밤 갈던 먹 밀어내고 아침이면 새 먹을 간다

 

  휘저은 당신의 갈필에서

  목젖 어여쁜 새가 되고 싶은 나는

  무스스한 털빛을 가다듬는다

 

  세파에 시달려 구불거리는 소나무

  껍질을 때리는 부벽준斧劈皴

 

  눈 내린 집 봉창에 구겨 넣는다

 

  그림자 얼었다고 뿌리까지 언 건 아닐 거야

 

  당신이 머물던 벼루와 연적 사이

  이제 내게 남겨진 일이란

  화선지 가득 고드름빛 새소리 번지게 하는 일

 

  낙관 찍힐 여백의 자리는 유배 중이니

  천 년 뒤에나 천천히 열릴 서랍에

  당신도 나도 밀어 넣는다

     -전문- 

 

 

  ▶ 신성 추구와 전복적 상상력(발췌) _ 이태수/ 시인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갈필渴筆과 검묵儉墨으로 그린 문인화 '세한도歲寒圖'에 화자의 심상풍경을 얹어놓은 「세한도에 덧칠하다」는 한겨울 추위 속의 풍경에 '문풍지처럼 가벼운 새의 몸', '부스스한 달빛을 가다듬는 목젖이 어여쁜 새가 되고 싶은 나', '세한도 속의 눈 내린 집 봉창에 부벽준을 구겨 넣는 나', '투명한 고드름빛 새소리' 등을 따스하게 '덧칠(보태기)해 그 분위기를 바꿔 놓는다.

   더구나 낙관落款 찍기를 유보하긴 해도 오랜 세월 뒤에 열릴 서랍에 화자뿐 아니라 추위를 견뎠을 추사도 밀어 넣기까지 하며, '세한도'에다 입체감과 질감을 부여하기 위해 부벽준 기법도 보태놓는다. 이 '세한도'에 덧칠하기는 "그림자 얼었다고 뿌리까지 언 건 아닐 거야"라는 믿음과 유배 중인 추사를 향한 따뜻한 배려의 마음이 포개져 있지 않은가. (p. 시 65-66/ 론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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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당문학』 2021-상반기호 <소시집/ 해설>에서

  * 김건희/ 2018년 『미당문학』으로 등단, 시집 『두근두근 캥거루』

  * 이태수/ 197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내가 나에게』 『그의 집은 둥글다』 외 다수, 한국가톨릭문학상 · 천상병시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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