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찢어버린 시/ 최정례(崔正禮)

검지 정숙자 2021. 2. 6. 16:54

 * 『문학사상』 2016-8월(526)호 <시>에서

 

 

    찢어버린 시

 

    최정례崔正禮

 

 

  거지같이 쓰여진 시는 찢어버리면 돼

  찢어버리고 다시 쓰면 돼

  그런데 휴일 날 셔터 내린 은행문 두드리며

  이놈들아 내 돈 내놔, 내 돈 내놔, 소리치는 저 여자

  그게 어떤 돈인데, 내놔,

  당장 내놓지 못하겠니?

  은행 문 때려 부수는 저 여자

  저 여자, 어떡하나

  거지같은 시 찢어버리고 찢어버리고

  그러다가 언젠가는

  대뇌에서 전두엽에서

  뭔가가 툭 끊어지면서

  필라멘트 간당거리듯 저렇게 발작이 시작된다면

  죽어야 되겠지, 죽지 뭐

  그런데 겉은 멀쩡한데 죽기가 쉬운 줄 알아?

  멀쩡하다가도 깜빡

  끊어졌다가 붙기도 하면서

  그런데 여긴 어딘가요?

  햇살 요양 병원이라고 말했잖아요

  내가 왜 여기 있지요?

  여기 주소와 전화번호 좀 적어주세요

  방금 적어 줬잖아요,

  아, 그랬던가요?

  도장은 절대 내놓지 않을 거야

  인감도장은 절대 빌려주면 안 돼

  실례지만 불펜 좀 빌려 주실 수 있어요?

  다시 적을게요

  그렇게 적고 또 적어 가면서

  고쳐 산다면 고쳐질까

  노숙자처럼 아무데서나 드러눕는 시들

  문인회 후원해주겠다는 경제과 선배랑

  술 먹다가 시 쓰는 이영광이

  꼴랑 백만 원 주면서 뭐 그렇게 말이 많아?

  하고는 휙 가버렸다

  난 수습하고 남아서 웃으면서

  선배님, 내년에도 후원해 주시는 거죠?

  하고는 즉시 말하고 싶었다

  노후가 보장된 연금 수급자들

  예술원 회원 되려고 줄서는 사람들

  그들 웃으면서 만나러 다니지 말고

  고쳐 살 수 있다면 고쳐 살고 싶었다

  쓰던 시 다 찢어버리고.

    -전문-

 

 

  시작노트

  몇 단어, 혹은 처음의 한두 줄이 나를 끌고 다닌다. 끝이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끌려다니다 멈추고 보면 이게 정말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일까 의심이 든다. 내가 시를 장악한다기보다 시에 내가 끌려다니는 편이 나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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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사상』 2016-8월(526)호 <시>에서

 * 최정례/ 시집 『내 귓속의 장대나무숲』 『햇빛 속에 호랑이』 『붉은 밭』 『레바논감정』 『개천은 용의 홈타운』, 시평집 『시여, 살아있다면 힘껏 실패하라』 『백석 시어의 힘』, 백석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수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오장환문학상, 미당문학상 등 수상

 

  * 블로그주:  최정례 시인(1955-2021.1.16.)// 묵은 잡지를 정리하던 중 위 시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겉은 멀쩡한데 죽기가 쉬운 줄 알아?"라는 구절을 읽으며 멍해집니다. 이 시의 발표 지면이 2016년 8월호이니까요. 부디 편안히, 영면에 드시기를···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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