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사상』 2016-8월(526)호 <시>에서
찢어버린 시
최정례崔正禮
거지같이 쓰여진 시는 찢어버리면 돼
찢어버리고 다시 쓰면 돼
그런데 휴일 날 셔터 내린 은행문 두드리며
이놈들아 내 돈 내놔, 내 돈 내놔, 소리치는 저 여자
그게 어떤 돈인데, 내놔,
당장 내놓지 못하겠니?
은행 문 때려 부수는 저 여자
저 여자, 어떡하나
거지같은 시 찢어버리고 찢어버리고
그러다가 언젠가는
대뇌에서 전두엽에서
뭔가가 툭 끊어지면서
필라멘트 간당거리듯 저렇게 발작이 시작된다면
죽어야 되겠지, 죽지 뭐
그런데 겉은 멀쩡한데 죽기가 쉬운 줄 알아?
멀쩡하다가도 깜빡
끊어졌다가 붙기도 하면서
그런데 여긴 어딘가요?
햇살 요양 병원이라고 말했잖아요
내가 왜 여기 있지요?
여기 주소와 전화번호 좀 적어주세요
방금 적어 줬잖아요,
아, 그랬던가요?
도장은 절대 내놓지 않을 거야
인감도장은 절대 빌려주면 안 돼
실례지만 불펜 좀 빌려 주실 수 있어요?
다시 적을게요
그렇게 적고 또 적어 가면서
고쳐 산다면 고쳐질까
노숙자처럼 아무데서나 드러눕는 시들
문인회 후원해주겠다는 경제과 선배랑
술 먹다가 시 쓰는 이영광이
꼴랑 백만 원 주면서 뭐 그렇게 말이 많아?
하고는 휙 가버렸다
난 수습하고 남아서 웃으면서
선배님, 내년에도 후원해 주시는 거죠?
하고는 즉시 말하고 싶었다
노후가 보장된 연금 수급자들
예술원 회원 되려고 줄서는 사람들
그들 웃으면서 만나러 다니지 말고
고쳐 살 수 있다면 고쳐 살고 싶었다
쓰던 시 다 찢어버리고.
-전문-
시작노트
몇 단어, 혹은 처음의 한두 줄이 나를 끌고 다닌다. 끝이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끌려다니다 멈추고 보면 이게 정말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일까 의심이 든다. 내가 시를 장악한다기보다 시에 내가 끌려다니는 편이 나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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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사상』 2016-8월(526)호 <시>에서
* 최정례/ 시집 『내 귓속의 장대나무숲』 『햇빛 속에 호랑이』 『붉은 밭』 『레바논감정』 『개천은 용의 홈타운』, 시평집 『시여, 살아있다면 힘껏 실패하라』 『백석 시어의 힘』, 백석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수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오장환문학상, 미당문학상 등 수상
* 블로그주: 최정례 시인(1955-2021.1.16.)// 묵은 잡지를 정리하던 중 위 시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겉은 멀쩡한데 죽기가 쉬운 줄 알아?"라는 구절을 읽으며 멍해집니다. 이 시의 발표 지면이 2016년 8월호이니까요. 부디 편안히, 영면에 드시기를···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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