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노래방
권성훈
모든 가사들이 주술같이 드나들며 바늘로 찌르는
아무도 없지만 아무나 있는 방
구석구석 점멸하는 눈빛을 숨길 수 없었던 거야
얼마나 많은 감정이 사라지고 돌아오며 재생되는
서로가 서로를 머금고 삼키며 뱉어내야 했던
마취의 밤은 아직도 거기에 살지
이 별에서 저 별로 어두워질 때까지 반짝이다
어디에도 살지 않기에 어디에나 살고 있는
유일한 당신과의 안식처
색이 바래가는 소파와 유독 사랑이 많이 구겨진 노래책
지문으로 흘러내리는 눈자위가 가물거려
한 여자가 부르는 노래를 한 남자가 듣지 못하는
주문에서 생략된 소리보다 가벼워지거나 무거워진다
같은 시간 다른 곳에서도 가시처럼 자라나
퍼져가는 화음으로 중력에서 벗어나고 있으니
오늘 만난 당신을 어제 부를 수 있는 것은
내일 부르던 당신을 오늘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
▶주술과 화음을 공존시키는 서정적 아이러니/권성훈의 신작들(발췌)_ 유성호/ 시인
이곳에서는 모든 노랫말이 주술呪術의 원리나 속성으로 존재한다. 점멸하는 눈빛처럼 순간의 환각으로 흘러간다. 모든 것은 있으되 아무것도 없는, 어디에나 살고 어디에도 살지 않는, 현존이자 부재인, 그런 상태가 노래방이라는 공간을 휘감고 있다. 가령 노래방은 숱한 감정들이 주술처럼 사라지거나 돌아오거나 재생되는 곳이다. 동석했던 이들이 서로 머금고 삼키며 뱉어내기도 했던 감정들은 "마취의 밤"이 지나고 어떤 충일한 흔적으로 남았을 것이다. 물론 그 흔적은 무르고 물러져 색이 바래가고 구겨져가고 가물거리게 된 시간을 함축한다. 한 여자가 부르는 노래를 한 남자가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도 그것이 '주문呪文'의 위상을 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중력에서 벗어난 '화음和音'의 질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만난 당신을 어제 부를 수 있는 것도, 내일 부르던 당신을 오늘 만날 수 있는 것도, 그곳이 바로 '유령 노래방'이기 때문이다. '유령 노래방'이라는 독자적 명명은 유령이 노래 부르는 노래방이라는 뜻도 담고 있고 노래방 자체가 유령이 이기도 하다는 점을 암시하기도 한다. '유령'은 최근 한국 문학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환상적 요소이자 이미지인데, 여기서 그것은 '시(쓰기)"의 속성을 환기하면서 오로지 사라짐을 통해서만 선명한 잔상殘像을 남기는 미학적 환영으로 은유된다. 아니 그것은 사라짐으로써 모든 사물을 항구적으로 남게 하는 원형이 되어준다. 이러한 역설을 노래하는 권성훈의 시는 그 비밀스런 원리로서 모든 존재자의 배면背面에 현존과 부재, 과거와 미래, 주문과 화음이 동시에 각인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에게 소멸의 순간이란 일정한 시간을 사이에 둔, '현존/부재'의 동시성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고, 그는 소멸해가는 존재자의 선명하거나 흐릿한 순간만이 '시(쓰기)'의 속성을 제대로 각인하는 미학적 시간임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p. 시 238/ 론 244-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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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다층』 2020-겨울(88)호 <다층 소시집/ 신작시/ 작품론> 에서
* 권성훈/ 2000년 『문학과의식』으로 시 부문 & 2013년 『작가세계』로 평론 부문 등단, 시집 『밤은 밤을 열면서』 외, 저서 『시치료의 이론과 실제』 『폭력적 타자와 분열하는 주체들』 『정신분석 시인의 얼굴』 『현대시 미학산책』 『현대시조의 도그마 너머』, 편저 『이렇게 읽었다-설악 무산 조오현 한글 선시』 등
* 유성호/ 저서 『서정의 건축술』『단정한 기억』등, <김달진 문학상>, <팔봉비평문학상> 등 수상,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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