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암묵적으로
강재남
침묵은 길고 단단했습니다. 아침을 읽어내기엔 여명이 터지지 않았고 일찍 당기기엔 비가 오고 있었지요. 어둠에 익숙해지려 자세를 바꾸었습니다. 동그랗게 물꽃을 피우며 빗방울이 흩어졌습니다. 비의 휴식처를 가늠해 보았습니다. 제 몸 누인 곳에 제 색을 입히는 빗방울. 꽃잎으로 떨어진 비가 꽃잎 문양이 되는 걸 무심히 흘리고 있었습니다. 키가 훌쩍 자란 여름이 색을 덧입었습니다. 놓친 걸 놓친 줄 모르는 나는 완결되지 못한 비의 서사를 기록하고 있었고요. 헤아려도 헤아려지지 않은 일들은 멀리 있다는 걸 비로소 알겠더군요. 어둠에 익숙한 눈동자가 어둠으로 빨려들고 있었지요. 저곳이 내 무덤일까요. 여름의 중심을 관통하는 빗방울들이 수직으로 꺾였습니다. 언제나 사랑해, 패랭이가 피었어 말하던 사람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언제나 사랑해. 목소리만 남아서 패랭이꽃을 피웠습니다. 여명을 끌어당겼습니다. 아침을 읽어내는 책사가 돼보기로 마음먹은 날이었습니다. 완결된 서사를 바라는 건 아니었습니다. 한생을 풀기엔 내가 한없이 낮고 초라해서였습니다. 그런 나를 안아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온전한 내 편인 나를 생각해 보기로 하는 겁니다.
----------------
* 계간 『다층』 2020-가을(88)호 <다층 시단> 에서
* 강재남/ 2010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이상하고 아름다운』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델몬트 유리병/ 신용목 (0) | 2021.01.27 |
|---|---|
| 검은 기린/ 김륭 (0) | 2021.01.27 |
| 길_단독비행/ 윤이산 (0) | 2021.01.26 |
| 쉿/ 권경애 (0) | 2021.01.26 |
| 맨드라미가 뱀이었다는 가설/ 박미라 (0) | 2021.0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