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김은상_알비노 인간의 별/ 인디고 비행 : 김희준

검지 정숙자 2021. 1. 20. 00:42

 

 

    인디고 비행

 

    김희준(1994-2020, 26세)

 

 

  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다정하신 모습으로 크레파스를 사 오셨다

 

  다음 날 학교에서 손등을 맞았다 도화지 30장의 내가 크레파스를 든 채 울고 있었다

 

  누구는 추상적으로 누구는 피상적으로 내 울음을 그렸다

 

  오후가 사실적이었으나 내가 가진 색은 섞이지 못하는 고질병을 앓았다

 

  나비와 아버지를 더 이상 그릴 수 없었다 그들은 평면적이었으므로

 

  마당에 핀 수국이 파랗게 컸다 크레파스가 색을 담아내려다 부러졌다

 

  아버지 손은 파랑이었다 안방에는 바닷물이 출렁였고,

 

  물의 혈관이 만져졌다 질감이 거칠다가 따뜻하다가 구도 없는 그림이 역동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의 언어를 이해한 자가 살갗을 만질 수 있다는데 뜻을 잘못 해석하여 호된 물질을 당했다

 

  이른 아침에 떠난 파도는 중력이 없다 눈치 없는 게가 옆으로 저미는 바람을 맞다가

 

  기울게 세상을 읽어낸다 나비가 입체적으로 바다를 향하고 있다

     -전문-

 

 

  알비노 인간의 별_김희준 시집,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문학동네. 2020)에 대한 소고(발췌)_김은상/ 시인 

 

  그에 의하면 우리가 속한 현실에서는 "기울게 세상을 읽어"내야 "나비가 입체적으로 바다를 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이 세계가 지극히 "평면적"이기 때문입니다. 고차방정식으로도 답을 구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지만, 남성이 구축한 세계에는 모든 '변수'를 흡수하는 '상수'가 정답으로 존재합니다. 그가 많은 시편에서 수없이 반복해 말하는 "태생"이 그것입니다. "태생"은 현실을 오른쪽과 왼쪽으로 구분하여 세상을 수직계열화합니다. 이는 "누군가는 추상적으로 누군가는 피상적으로" 당신의 "울음"을 그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수한 "태생"은 늘 오른쪽에 있고, 오른쪽에 있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조차 낙원에 있을 수 있습니다(누가복음 23:43). (p. 183-184)

 

  그가 월간 『시인동네』를 통해 문단에 데뷔를 알린 2017년은, 그의 어머니가 첫 시집을 출간한 해이기도 합니다. 공교롭게도 시인으로서의 그와 어머니의 첫 시집은 나이가 같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그는 혈연 같은 어머니의 시를 자신의 내부로 끌고 와 유서 같은 시를 남기기도 합니다. "구름의 언어를 익히느라 여러 해를 허비했다"로 시작하는 어머니의 시 「훌쩍 훌쩍」은, 그의 시 「악수」*에서 호흡하고 있습니다. (p. 190-191)

 

 

  구름의 언어를 익히느라 여러 해를 허비했다

 

  홀쭉한 뺨과 쪼글쪼글한 입술을 맞바꾼 그날은 영혼 없는 구름이 몰려다녔고 바람 닿는 곳에서 마을이 생겨났다

 

  마을 어귀를 조금씩 잘라먹는 무당벌레에게 사흘을 떼주고 생채기 난 감나무를 쓰다듬느라 한 계절이 흘렀다

 

  일곱 해를 구름이불을 덮고 잠이 들었다 햇볕에 잘 익은 구름으로 일곱 해 끼니를 때웠다 모든 영혼 없는 것의 순결한 영혼을 생각했다

 

  가끔 비밀스런 문장으로 비가 내렸다 비의 문체는 순해서 책갈피에 넣어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날에는 구름이 층계마다 감정을 피웠다 감정의 잎을 엮어 우산을 만들었다 오래된 오후가 젖고 있었다

   -전문, 강재남 「훌쩍 훌쩍」( 『이상하고 아름다운』 서정시학. 2017)

 

 

  언젠가 그는 말했습니다. "깨닫지 못했던 감정을 이해하는 순간이 있"고, "그건 누군가가 나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를 썼다는 증거"(「우체통」*)라고요. 나는 그 말을 믿습니다. 한세상을 뜨겁게 살다가 어느 행성으로 떠나간 '시인들의 시인', 김희준의 평안을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p. 197)

 

 

 

   * 블로그주: 김희준의 시 「악수」와 「우체통」은 본 블로그에서_검색 가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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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시작』 2020-겨울호 <특별기고> 에서

  * 김은상/ 2009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 『유다복음』, 장편소설 『빨강 모자를 쓴 아이들』, 중편소설 『나의 아름다운 고양이 델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