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훔치고 싶은 시 한 편(발췌)
장석원
시인 시인은 모든 면에서 백치가 될 수 있지만,
단 하나 시인을 발견하는 일에서만은 백치가 아니다.
시인을 발견하는 것은 시인이다.
시인의 자격은 시인을 발견하는 데 있다.
김수영, 「시인은 정신의 미지(未知)」(1964.9.)
꼭 쓰고 싶은 시어가 있지만 마음대로 구사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실패하더라도 한번은 시에 박아 넣고 싶은 시어. '반동', 「거대한 뿌리」에 박혀 있는 '반동'은 '전통'과 함께 "제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 기둥" 같은, 시를 떠받치는 두 기둥이다. 반동이 없었으면 김수영이 발견한 전통의 가치는 희미해졌을 것이다. 반동이 전통이었고 전복이었다. 김수영이 온몸으로 껴안은 전통은 이러하다.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김수영은 환희에 젖어 "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고 외친다. 반동을 지칭하는명사들의 축제(carnival)가 황홀하다. 반동을 새로운 전통으로 인식하게 된 김수영. 일본어를 모국어로 배우고 영어를 전공한 시인이, 시를 쓰는 과정에서 뒤늦게 한국어를 학습한 김수영이 '나' 이전의 모든 과거가 축적되어 형성된 '우리 것'의 뿌리를 발견한다.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은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였으니까. 김수영이 표현하는 '거대한' 뿌리의 이미지는 이렇다. "괴기 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커먼 가지를 가진" 뿌리. 나는 김수영이 구현한 숭고한 두려움의 이미지에 매혹된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寅煥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파라다이스처럼 생각한다" 파동이 일어난다. 유장하지만 격절隔絶되면서 울컥거리는 리듬과, 이 리듬을 구동하는 장거리 구문의 통사적統辭的 반복과 강세가 아름답다. 김수영이 일러 준 대로 작품다운 작품을 쓰고 싶다. 언어의 서술과 언어의 작용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시를 한 편이라도 쓰고 싶다.
1964년, 마흔셋이 되던 해에 김수영은 「거대한 뿌리」를 썼다(43세, 요즘 '아재'나 '꼰대'로 부르기에 적당한 나이다). 문학사에서 이 작품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해 이 글에서 정리할 수는 없다. 함부로 '위대하다' 같은 형용사를 사용할 수도 없다. 이 시가 아니라 다른 시의 수식어로 적당한 단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작품을 두고 개인이 판단한 주관적 가치를 남발하는 경우가 흔하다. 주례사 비평도 많지만, 터무니없고 악의적인 오독의 독기도 결코 적지 않다. 시를 문학성이 아닌 다른 이유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 부류도 있다. 나의 진영과 미의식에 맞지 않으니 일부러 까야겠다고 다짐한 무뢰한 같은 평론가들도 있다. 비평이 권력인 줄 아는 자들이다. 그들은 몰려다니며 하이에나 떼처럼 물어뜯는다. 김수영의 시대에 횡행했던 일이었다. 지금은 사라졌다고 확언할 수 있을까. (p.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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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파란』 2020-겨울호 <essay>에서
* 장석원/ 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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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참조>
巨大한 뿌리
김수영(1921-1968,47세)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南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以北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八· 一五 후에 김병욱이란 詩人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四年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强者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女史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一八九三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英國王立地學協會 會員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世界로
화하는 劇的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無斷通行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外國人의 종놈, 官吏들뿐이었다 그리고
深夜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려
闊步하고 나선다고 이런 奇異한 慣習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天下를 호령한 閔妃는 한번도 장안外出을 하지 못했다고···
傳統은 아무리 더러운 傳統이라도 좋다 나는 光化門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寅煥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埋立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패러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女史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歷史는 아무리
더러운 歷史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追憶이
있는 한 人間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女史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進步主義者와
社會主義者는 네에미 씹이다 統一도 中立도 개좆이다
隱密도 深奧도 學究도 體面도 因習도 治安國
으로 가라 東洋拓殖會社, 日本領事館, 大韓民國官吏,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種苗商,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無識쟁이,
이 모든 無數한 反動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第三人道橋의 물 속에 박은 鐵筋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怪奇映畫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想像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전문, 1964. 2. 5./ 韓國現代詩文學大系 24 『金洙映』(지식산업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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