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백인덕_숙연한 심적 고투...(발췌)/ 냇물의 이력서 : 이경우

검지 정숙자 2020. 12. 19. 21:17

 

 

    냇물의 이력서

 

    이경우

 

 

  1.

  나는 다만 흘러간 물에 지나지 않았다

  작은 바위틈에서 태어났다

 

  나는 물 위에서 성장하였고

  몇 번의 만남과 이별

  빈번한 이직과 전직이 내 삶의 전부였으니

  여기, 내 가슴의 찰랑이는 흰빛을 보아라

  이 빛은 내가 흘러온 시간이며 살아온 길의 징표이다

 

  우울한 날의 오후엔 오동잎 하나 그 위에 앉아

  무당벌레처럼 노닐기도 했다

  서걱대는 갈대와

  내 몸 위로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살과 어울려

  한나절을 보내던 때도 있었다

  가끔은 내가 나를 보아도 깊은 강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2.

  속이 깊은 것들은 곧게 흐르지 않는다

  소리는 내지 않고 

  서두르거나 쉬이 제 속내를 드러내지도 않는다

  멈춘 듯 혹은 흐르는 듯, 천천히

  아주 천천히 돌아서 간다

 

  강물 따라 한 시절을 흘러온 나는 아직도

  강물처럼 둥글어지지 못하였다

  고요해지지도 못하였다

  한껏 비대해진 몸과 번들거리는 눈빛

  각진 얼굴과 가시투성이의 혓바닥

  이제는 모두 저 강물에 씻고 헹구어 진정 둥글어지기를

  석양에 드리운 그림자가 길어지듯이

  세월 속에 드리워진 내 마음의 고요도 깊어지기를 소망한다

  마음속 어둠을 걷어내며

  익명의 물살에 숨겼던 노염과 분노 하나둘 쓸어내리며

  다독이며

     -전문-

 

  

  숙연肅然한 심적 고투苦鬪의 울림/-이경우의 시적 지향(발췌)_ 백인덕/ 시인 

  시인은 냇물의 이력, 아니 '이력서'를 한 번 써봄으로써 자신과 냇물의 같고 다름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자신이 설정한 방향에 더 큰 의의와 위력을 덧붙이고자 한다. 이를 시인은 1연에서 분명하게 작품의 전면에 노출한다. "나는 다만 흘러간 물에 지나지 않았다"라는 고백적 선언은 언표 그대로 물에의 친연성과 지향성을 다 함축하고 있다. 이어 시인은 '작은 바위틈에서' 출생한 내력과 물 위의 성장, 이제 '내 가슴 찰랑이는 흰빛'으로 내가 흘러온 시간이며 살아온 길" 즉, 생의 이력을 다 보여준다.

  이 비유들을 통해 이경우 시인의 삶의 궤적을 막연하나마 유추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작업이 굳이 선행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시인은 '냇물의 이력서'를 작성하면서 사실은 자신의 방향을 수정하려는, 아니 더 세심해지려는 의도를 가졌기 때문이다. '이력서'라니, 현실에서 이력서는 과거의 행적을 기록할 뿐, 현재의 나를 온전히 반영하지 못한다. 마치 능력을 보여줄 순 있으나 역량을 평가할 수는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시인은 한결같아 보여도 언제나 다른 '냇물'의 이력서에 자기 삶의 궤적을 비유함으로써 이 한계를 뛰어넘어 현재와 미래의 지시 방향을 탐색하는 작업으로 전환하고자 한다. (p. 시 75-76/ 론 8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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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술가』 2020-겨울호 <이 시인을 묻는다/ 자선근작시/ 평론> 에서

  * 이경우/ 강원 원주 출생, 2004년 『시사사』로 등단, 시집 『치악 통신』 『행군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지 않았다』

  * 백인덕/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오래된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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