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김백겸_그 연약함이 길게 이어지는...(발췌)/ 눈 내리는 날의 편지 : 양애경

검지 정숙자 2020. 12. 16. 01:53

 

 

    눈 내리는 날의 편지

 

    양애경

 

 

  눈이 내려요 그대 잘 있는지? 길은 진흙탕에 잠기고 우산 없는 사람들 목덜미를 움츠리고 걸어요 기억하는지? 밖에서 들어오면서 방에 있던 아이의 등덜미에 찬 손을 쑥 집어넣던 장난을? 대학병원 앞 네거리에서 차가 잠시 멈추었죠 추레한 나무들, 찌푸린 사람들, 응급조치를 기다리는 듯 어거주춤한 병원 건물 모두가 불완전해 보이고 그래서 어쩐지 다정했어요

 

  끊임없이 '의미 없음'과 싸워요 전에는 창을 열면 냉기가 훅 끼치듯 문득 문득 부딪치곤 하던 것인데 이젠 사방에서 일어나 우뚝우뚝 서지요 난 '의미 있다!'를 가지고 그것들을 쫓아버리려 애를 써요 하긴 일상의 삶이 '의미 있어'야 할 이유가 뭐겠어요? 행복한 사람들은 아무도 그런 덴 신경조차 쓰지 않을 텐데. 집에 돌아왔지만 옷을 갈아입고 눕기가 싫었어요 하지 못하고 온 일이 있는 것 같아서. 사실 그게 뭔지도 알지도 못해요

 

  아는 사람의 전화. 선 저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어쩐지 외로웠어요 하지만 왜 외로움을 타요? 라고 묻지는 않아요 규칙이 있다는 걸 알거든요 그게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점점 더 사람들 얼굴을 쳐다보지 않게 돼요 상점 몇 군데를 갔고, 점심을 먹었고, 서점이 사람으로 끓었고, 버스를 기다리는 줄이 길었는데 오늘 본 얼굴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아요 아름답든 심술궂든 불쾌하든 우스꽝스럽든, 모두들 얼굴을 가지고 있었을 텐데. 내 얼굴을 본 사람도 없었겠죠 이제 얼굴이 필요 없게 될까요?

 

  무늬유리 이중창 뒤에서 아직 눈이 내리고 있을 거예요 풍경들이 뭉턱뭉턱 지워지고 있을 거예요 4B연필로 그린 밑그림은 진하게 그려진 것 같아도 지우개를 대면 뭉턱뭉턱 지워져 나갔었지요 늦겨울 진눈깨비가 내리면 시간이 잘 지워지는 것 같아요 사람들도 지워지고 기억도 지워지죠 그렇게 쓰라렸던 것들마저도. 나는 아직 지우지 마세요 내가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려면 붉은색 물감이라도 한 통 엎질러야겠군요 안녕 잘 자요 내일은 맑을 것 같아요.

   -전문, 『불이 있는 몇 개의 풍경』(1988. 청하)

 

 

  그 연약함이 길게 이어지는 비단실 같은 여운의 시들/ -시인론(발췌)_ 김백겸/ 시인 

  양애경 시인은 필자와 대학시절부터 오랫동안 시를 같이 공부한 인연이 있다. 평론가의 입장에서 본 양 시인의 시는 그동안 시집 해설과 시집 서평 등에서 다룬 적이 있으니 이번에는 독자와 문우의 입장에서 시를 말해 보기로 한다. (p. 91)

 

  양애경 시인은 중학교 교사를 하면서 대학원 석사와 박사를 마치고 시간강사를 하는 현실의 고달픔, 그리고 결혼시장에 던져진 혼기의 여자가 느끼는 갈등에 대한 시들을 발표했다. 시인의 실존적 상황을 진솔한 필치로 그려내 독자들의 공감을 유혹하는 시들을 썼는데 창비에서 출간한 『바닥이 나를 받아주네』의 시편들이 그렇다. 양애경 시인의 시는 언어의 우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  나르시스를 비치는 그대로 드러내는 장점이 있다. 시인들도 사회적 인간이어서 타인과 사회가 자신을 어떻게 볼까 하는 두려움에 대부분 시인들은 페르소나로 자신을 일정 부분 위장한다. 시인 양애경은 이 장면에서만큼은 놀라울 만큼 솔직하게 자신의 욕망과 환상을 드러낸다. (p. 93)

 

  플라톤이 『향연』에서 설정한 우화  제우스가 양성으로 창조한 인간으 힘이 너무 강력해 신의 권력에 도전할까 봐 양성을 갈라놓고 서로 짝을 찾는 에로스에 평생을 헤매도록 한 스토리  에는 인간 운명의 진실이 있다. 인간은 양성의 결합으로서만 운명  자손을 통해 죽을 운명의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해진다는 알레고리, 필멸의 존재인 남자와 여자는 에로스의 욕망으로 죽음을 필사적으로 넘어선다는 알레고리. 양애경 시인은 현실에서 얻지 못한 에로스의 자식을 작품으로 승화해서 자신의 자식들  시를 세상에 남긴다. 후세의 연인이 그 작품들을 나르시스의 우물 속에 비친 전생의 사랑으로 바라볼 것을 희망하면서. (p. 9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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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크 『화요문학』 2020년 24호/ 2020. 11. 20-발행 <화요문학 시인 조명> 에서 

  * 양애경/ 198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맛을 보다』 외 다수

  * 김백겸/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지질 시간』 등, 시론집 『시적 환상과 표현의 불꽃에 갇힌 시와 시인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