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함순례
오래된 편지를 읽습니다 당신에게로 갔다가 우리 속에 놓여진 편지 당신을 만나
즐겁다, 쓰여있군요 행복해요, 라고도요
가까이 있으면 자랄 수 없다는 듯 간격을 두고 발끝 세운 나무들처럼 큰 바람이
일렁일 때나 사르락 손 내미는 이파리처럼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곁눈질로 골똘했지요 이따금 새들에게 눈 맞추는 건 헛김나는 일이어서 나는 그만
아득해져 혼자 말갛게 익어가는 산감이 되었더랬지요
그런데 묘목을 심은 첫 자리 뱀처럼 얽혀 있는 우리의 뿌리를 만납니다 나의 밑둥
썩은 감꼭지 핥고 있는 이가 바람이려니 했더니 당신이었군요
벌거숭이 산길에 가위눌리는 일도 끝이지 싶네, 내게로 온, 오늘 문득 층층이 허물
벗은 골짜기 따라 우거진 숲을 읽습니다
-전문-
▶'숲'이라는 한국어/-자음과 모음으로 부는 바람의 잠재태(발췌)_ 우진용/ 시인
숲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다는 것은 그만큼 삶이 성숙해졌다는 의미겠지요. 이파리처럼 무수한 인연들이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하는 것이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 점에서 숲은 삶의 등가물입니다. 묘목을 심은 첫 자리가 어느새 '밑둥 썩은' 세월로 다가오듯이 삶은 시간과 함께 애잔하게 흘러갑니다.
그래도 행복한 것은 오래전 편지를 보냈던 당신을 만난다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지요. 오래된 편지를 읽듯 이제는 숲을 읽습니다. 숲이라는 자연에서 세상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다만 거기에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 뿐이라는 것도 깨닫습니다. (p. 6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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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크 『화요문학』 2020년 24호/ 2020. 11. 20-발행 <기획 특집> 에서
* 우진용/ 2003년 『시사사』로 등단, 시집 『혼』 『한뼘』 『회문』, 한자 교육서 『한자어에 숨은 공부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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