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살표를 위하여 · 1
함민복
어느 날
일터를 향해 달리다 멈춘 차에서
여기까지 오며 몇 개의 화살표를 만났을까
몇 번 화살표의 지시를 따랐을까
한두 번만 지시를 어겼어도
여기에 다다르지 못했을
어쩌면 치명적인 결과에 놓였을지도 모를
이 세계는 화살표의 숲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지 않는 곳은 없네
화살표가 또 다른 화살표로 배턴을 넘기고 있는
이 세계는 방향의 숲
시간마저 돈으로 환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화살표는, 시간의 낭비를 단축할 수 있는
시간을 사냥할 수 있는 화살
속도를 섬기는 신앙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 것들을 움직이는 으뜸가는 것을 신이라 했던가*
그렇다면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움직이는 것들을 돕고 있는
화살표의 정체는 무엇일까
혹 우리 시대에 여러 모습으로 현현한 '가라' 메시아는 아닐까
문명에서
갑자기 모든 화살표가 사라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초침 분침 시침이 모두 화살표로 되어 있던
꼬리가 원점에 잡혀 회전하며
방향을 시간으로 전환해 주던
촌각이 방향 속에 있음 알려주던
옛 괘종시계에서
뎅 뎅 뎅
화살표의 울음소리가
시간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조수석에서 눈을 감고
차는 화살표 방향으로 다시 출발한다
화살표의 뾰족한 배웅에 찔려
등이 뻐근해지고
화살표의 영혼인 방향과
동행 길에 오른다
-전문-
* 아리스토텔레스, 김진성 역, 『형이상학』. 이제이북스
▶"방향 지운 화살표의 어떤 궤적/-함민복의 새 시를 읽다(발췌)_ 최현식/ 문학평론가
화살촉이 달린 화살을 모방하여 그 이미지와 명칭이 부여된 '화살표(arrow head)는 기껏해야 18세기 들어 발명된 신생의 문장부호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세계는 화살표의 숲"이란 함민복의 정의가 암시하듯이, 그것은 글쓰기에서 명확한 방향과 행동을 지시하는 단순한 '문장부호'를 훌쩍 뛰어넘은 지 오래다. 사실 '화살표'는 '안내'와 '지시'를 넘나드는 이중적 맥락을 본질로 한다. 전자라면 갈 길 모르는 타자에의 친절과 배려가, 후자라면 뭇 군중에 대한 이미 정해진 길로의 강제와 집합이 보다 도드라진다. '끔찍한 모더니티'의 기승과 더불어 '화살표'가 후자 쪽으로 그 날카롭고 뾰족한 '촉鏃'을 보란 듯이 날려 왔음은 "한두 번만 지시를 어겼어도/ 여기에 다다르지 못했을/ 어쩌면 치명적인 결과에 놓였을지도 모"른다는 담담해서 오히려 불안한 시인의 고백에서 뚜렷하게 감지된다. 아무려나 우리가 만약 세계의 모든 "촌각이 방향 속에 있음"(이상 「화살표를 위하여·1 만남」)을 승인하고 수렴할 수 있다면, '화살표'는 스스로를 '보편적 진리'로 지시하고 명명하는 '물신物神', 다시 말해 잘 만들어진 절대 권력의 표상이자 기호로 현현하거나 작동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가만히 보면 '모래시계'는 마치 장고처럼 꼭짓점을 마주보는 '화살표'(▶◀)를 닮았다. 그것 안에 담긴 그 숱한 '모래알들', 곧 이 세상의 온갖 존재와 사물들은 타자의 자신과 타자의 가장 좁은 곳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자유롭고 안정된 서로의 영토로 널리 그리고 깊게 퍼져나갈 수 없다. '방향 지운 화살표'의 진정한 지향이 그 가장 좁고 뾰족한 곳에 삶과 죽음의 자리에 죽음과 삶의 가능성을 동시에 뚫거나 내파하는 것이어야 할 까닭인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시인 함민복은 날카롭고 차가운 '화살표', 너머의 부드럽고 따사로운 나비의 "생명의 날개"(▷◁)를 애틋하게 바라보고 있다. 함께 읽은 신작시들의 핵심적 의미가 자리한 곳도 여기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p. 시 61-62/ 론 73 // 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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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문예』 2020-가을호 <신작시 특집/ 해설> 에서
* 함민복/ 1988년 『세계의문학』으로 등단, 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말랑말랑한 힘』 등
* 최현식/ 199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평론집 『말 속의 침묵』 『시를 넘어가는 시의 즐거움』 『김웅의 시학』 등, 저서 『서정주 시의 근대와 반대』 『신화의 저편』 『한국 현대시와 내셔널리즘』 등, 공저 『새로 쓰는 현대시 교육론』 , 현 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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