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 봄꿈
박성현
당신의 몸에 바람이 파고든 흔적이 있다
그 흔적의 깊이와 완력은 당신 속으로 내려앉았던 돌 하나의 무게, 잔설이 멈춘 순간이다
붓이 까마득한 벽에 닿았을 때 시간의 연골이 바쁘게 빠져나갔다
속이 파이고 거죽만 남은 목어가 간신히 지느러미에 묻은 흙을 털었던 것인데
지천에 널린 반백의 입술들이 쏟아 낸 것은 말이 아니라 울음들이 뒤엉킨 소리였다
단단한 것들이 피고 지는 몸에 다시 꽃잎이 터지고 허공은 그만큼 밀려났으며, 또한 살과 뼈의 경계는 분명해졌다
바람 한 무리가 새의 겨드랑이를 흔들거나 낙타에 앉아 휘파람을 불었다
눈에 박힌 빙하는 녹이고서야 당신은 봄꿈에서 깨어났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주지하듯 '세한도歲寒圖'의 연원은 『논어』의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라는 구절이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세한도 자체가 전고에 힘입은 소산일 것인데 인용된 시 역시 세한도와 관련된 맥락을 전제로 하고 있다. 시에 사용된 진술들은 직접 세한도를 지시하지 않는다. 시 속에서 구조화되는 것은 세한도라는 기호가 계속해서 일으키는 의미화 작용의 파장 위에서 성립되는 '나'와 '당신'의 관계이다. 날이 차가워진 연후에 그 본뜻을 알게 된다는 고사에 비추어 '당신'과 '나' 사이에 쉽지 않은 시간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시간이 경과하고 난 후에야 명료하게 보이는 바가 있다는 깨달음이 시의 기저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에 제시된 강렬한 이미지들은 바로 그 시간의 흔적을 선염하게 각인시킨다. "당신의 몸에 바람이 파고든 흔적", "당신 속으로 내려앉았던 돌 하나의 무게", 붓이 닿았을 때 바쁘게 빠져나가는 "시간의 연골", "속이 파이고 가죽만 남은 목어", "새의 겨드랑이를" 흔드는 바람 등의 이미지는 추사秋史의 세한도 자체를 직접 묘사하고 있지 않지만 세한도가 낳은 의미의 파장 안에 있음이 틀림없다. 고통의 흔적과 황량함뿐만 아니라, 이 시집에 실려 있는 다른 시의 제목을 가져와 표현해 보자면, 깊은 상처를 안고도 스러지지 않고 '하염없이' 제자리를 지키는 태연함과 의연함이 함께 읽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p. 38-39/ 론 122-123)(조강석/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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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에서/ 2020. 10. 15. <문학수첩> 펴냄
* 박성현/ 2009년 ⟪중앙일보⟫로 등단, 시집 『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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