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인간의 숲/ 이세화

검지 정숙자 2020. 10. 29. 03:00

 

 

    인간의 숲

 

    이세화

 

 

  내 속엔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당신이 말했지 담배도 없이 입김을 태울 수 있는 겨울 도심의 산책로에서

 

  차라리 이곳이 우주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단 한 번만 밀어내도 영원히 멀어질 테니 암흑 속으로 사라지는 당신을 바라보며 나는 함께 간 적 없는 바다를 떠올릴 텐데 섬보다 높은 바다 넘쳐오는 파도 바람 당신의 표정 잊어버리겠지 잊어버리고 그리워하겠지 후회할 새도 없이 혼자가 되겠지 커다란 점 같은 어둠 속에서 선도 되지 못하고

 

  오래전 어둠 너머로 돌아간 네 형상을 생각하며

  소리를 질러 보겠지 저 멀리

  닿지 않는 메아리를 믿어야겠지

 

  나무들은 거짓말을 한다 이 길을 지나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고 등대인 척을 해 무릎을 스치는 덩굴 늘어 가는 생채기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왜 숲으로 도망칠까 숲에선 누구도 만날 수 없기 때문일까 진실로 소리를 쳐 봐도 마주하는 건 나 자신뿐 우리는 진정으로 타인이라 하나의 문장은 스치는 풍경조차 되지 못했다

 

  배 속이 가렵다 거리에 떨어진 짝 잃은 장갑은 자주 죽은 들짐승 같지 그치만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이곳은 그저 커다란 별 거대한 나무 굵은 갈대 쏟아지는 강물 숲은 아니고 사람들이 많은 도시 이곳에 남은 건 다정을 모르는 당신과 오랫동안 사랑하는 일 방향도 없이 우리가 이렇게 걷다 보면 어둠을 어둠으로부터 밀어내듯 점점 빠져나올 수 없게 되겠다 늪도 물도 아닌 이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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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허물어지는 마음이 어디론가 흐르듯』에서/ 2020. 9. 26. <파란> 펴냄

   * 이세화(본명, 배지영)/ 2016년『시작』으로 시 부문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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