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잭슨 콕 튜토리얼/ 서호준

검지 정숙자 2020. 11. 1. 02:35

 

 

    잭슨 콕 튜토리얼

 

    서호준

 

 

  슬픔의 왕을 죽이고 기쁨을 얻었다

  잭슨 콕의 시대다

  기쁨의 해장 라면 세트를

  통째로 먹었다 눈치 안 보고

  잭슨 콕이 계산해 줄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 여관을 빠져나왔다

 

  시계탑은 어디 있지

  광장 가득한 잭슨 콕의 깃발

  한쪽은 찬탈자 잭슨 콕

  다른 쪽은 해방자 잭슨 콕을 외치며

  함께 기쁨을 누리고

  소리 지르는 게 이렇게 황홀할 줄이야

 

  말론 강 근처의 구두 수선소를 전부 뒤지고나서야

  변장한 잭슨 콕을 찾아냈다

  그러나 아직 해결할 일이 남았다고 했다

  며칠 잠을 못 잤고

  피 묻은 옷을 빨지 못했으며

  무엇보다도 왜 자신이 아직도 슬픈지

  이렇게나 슬픈데 자꾸만 잠이 쏟아지는지

 

  나는 성으로 돌아가 방을 돌아다니며

  수도꼭지를 틀었다

  무엇이 나오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왕의 초상화가 군데군데 걸려 있었는데

  전부 표정이 달랐다

  이 사실을 전해야겠어

  착수금을 올려 받을 수 있겠지

 

  계절이 조금씩 길어졌다

  떠돌이 의사와 내기 빙고를 하는데

  말끝마다 잭슨 콕은, 잭슨 콕은, 하기에

  그렇게 좋냐고

  그러자 정색하며 아니라고

  그 정도까지는 원치 않을 거라고

 

  기념일이 되어 나는

  필드의 우체통을 전부 뒤졌지만

  잭슨 콕은 없었다 이번엔 무엇으로 변장한 걸까 밥은 잘 먹고 다니나

  쓸데없는 걱정까지 생기는 걸 보니

  은퇴할 떄가 다 되었군

 

  왕을 완전히 잊어버린 사람은

  자식을 낳아도 성을 붙이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마르데유 묘지에 벌집형 무덤이 둘 있다던데

  자네 솜씨라면야

     -전문-

 

 

  해설> 한 문장: '잭슨 콕 튜토리얼'이란 잭슨 콕 안내서, 지침서, 시스템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잭슨 콕이라는 인물은 무엇인가. 슬픔 위의 기쁨, 이것이다. "광장 가득한 잭슨 콕의 깃발"은 이 무명용사로 보이는 인물이 슬픔의 제국에서 기쁨을 탈취한 자가 되었음을 선포한다. 그는 그러므로 '찬탈자'이자 '해방자'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는 '변장'을 하고 무언가 "해결할 일이 남았다"고 한다.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는 완성된 자로 보이지만 그런 의미에서 미완된 자이다. 뒷부분에 가면 "잭슨 콕은 없었다"고도 한다. 존재를 취소하기도 하는 것이다. 잭슨 콕은 앞서 등장한 많은 인물이나 캐릭터들보다 흥미로운데 바로 어떠한 장르에서도 빌려오지 않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특징화를 하면서도, '없었다'는 말로 바로 특징을 치워 놓기 때문이다. 찬탈, 해방, 변장이라는 말은 '업었다'는 말과 함께 공존하고 있다.

  시인은 '잭슨 콕'이라는 가상의 깃발을 왜 광장에 꽂았을까. 썩은 광장에 썩은 깃발을 꽂는 것은 쓸모없는 일일 수 있는데, 혹은 아무도 없는 광장이어서 혼자만의 깃발을 꽂는 일이 마찬가지로 쓸모없는 일일 수 있는데, 왜 이러한 소용없는 일을 할까. 정작 잭슨 콕은 "며칠 잠을 못 잤고/ 피 묻은 옷을 빨지 못했으며" 무엇보다도 왜 자신이 아직도 슬픈지/ 이렇게나 슬픈데 자꾸만 잠이 쏟아지는지" 횡설수설한다. 선언적이면서도 퇴락한 광고물처럼 보이는 이 장면이 시에 대한 거의 고백으로 느껴지는 것을 이쯤에서 부정할 수는 없다. '잭슨 콕'과 깃발은 시의 사라진 위용과 만용과 고립과 명상과 고단을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는 서호준 식의 풍유인 것이다. 깃발은 영광의 흔적이자 무용함의 선언이다. 그리고 잭슨 콕이 '없었다;고 하듯이 시의 영광과 시의 무용함도 이제 눈에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잭슨 콕의 자조적인 성분을 위시하야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 캐릭터들은 상이한 힘으로 자신의 이질성을 유지한 채 시에 부딪친다. 그의 시는 파괴와 공존이 타협하지 않기에 특정한 영토로 수렴되지 않는다. 시가 일정한 바운더리 없이 펼쳐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넓이가, 확장이 시에 대한 그의 모험을 증거한다는 점이다. 존재와 세계의 이질적 대면을 위해 시대와 역사, 출처를 막론하고 불려 나온 인물들이 그의 시를 빼곡히 채운다. 어쩌면 모험은 크기에 다름 아닐지도 모른다. 다양한 곳에서 호출된 만큼 그들이 움직이는 범위가 모험의 크기이자 곧 시의 크기가 되는 것이다. 시는 의구심에 아랑곳없이 확장된다. 그리고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그의 자아는 어쩌면 이 출몰하는 용병(?)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이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불시착한 캐릭터들이 투입되어 돌아다니는 그 주변에서 자아는 자신의 부재를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p. 시 48-50/ 론 120-121) (이수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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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소규모 팬클럽』에서/ 2020. 9. 28. <파란> 펴냄

   * 서호준/ 1986 출생, 문학 플랫폼 <던전>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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