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모차
박해람
버려진 유모차 한 대를 힘없는 노인이 의지하며 끌고 간다.
지팡이를 타고 다니는 마녀처럼
저 노인에게는 저 유모차가 지팡이인 셈이다.
더 이상 굴러가지 않았던 시간 동안
뼈마디는 더 여리고 약해졌다.
그 여린 관절들이 삐걱거리며 걸어간다.
마치 수동 타자기로 글자를 찍듯 한 발 한 발 꼭꼭 찍으며 언덕을 올라간다.
걸음마를 새로 배우려는지
등 뒤에서 차가 경적을 울려도 뒤돌아보지 못한다.
가만히 보니 유모차 한 대가 굴러가고 있다.
내장이 모두 사라진 빈 유모차다.
몸을 감싸던 폭신한 내용물들이 모두 썩어 없어진
속이 텅 비워져버린 빈 유모차 한 대가 굴러가고 있을 뿐이다.
다 썩어 냄새나는 옹알이 몇 마디만 고여 있는
내가 바라보고 있는 이 오전의 시간이
저 노인에게는 한 생의 반나절이다 어쩌면
저 언덕을 다 오르는 것으로 남은 반나절을 채우는 중인지도 모른다.
지나온 길을 금세 잊어버리는 바퀴와
그 골목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녹이 슬어가는 저 유모차.
그곳의 길에 알맞은 걸음을 배우고 있는
저 노인老人.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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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자꾸 흘러내린다
잠든 아이를 등에 업고 서성거린다
아이가 자꾸 흘러내린다
이 불안한 직선의 침실에서 아이는
깨어날 때까지 여전히 흘러내릴 것이다
그러다 때가 되면 나도 내 등을 내려놓고 떠날 것이다
잠에서 깬 아이의 가슴에
굽은 등 하나가 무겁게 붙어 있겠지
때가 되어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들일지라도
흔적은 남는 법이다.
나는 아직 아버지의 등에서 잠들었던 기억 중이다 언제 내가 아버지의 등에서 흘러내렸는지
기억나질 않는다
아버지의 등과 내 가슴팍이 서로
붙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잠든 내가 가끔 아버지의 등을 보는 날들도 있다.
맞붙은 것들은 다 성처의 후예들
그것이 떨어질 때 서로가 아픈 것처럼
언젠가 딸아이의 아픔이 될 나와
나의 아픔이 된 아버지가 지금도 서로 붙어 있다
이렇듯 가족이란 상처의 제 짝이다
서로 엉겨 붙어 한 시절 아물어가는 상처의 짝
등에 붙어 있는 이 상처의 딱지
누가 먼저 아플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고.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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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가는 사내』에서/ 2006. 6. 30. <달샘> 펴냄
* 박해람/ 1968년 강원 강릉 출생, 1998년 『문학사상』 신인 공모에 「수화手話」 외 3편이 당선되어 등단, 『백 리를 기다리는 말』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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