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그믐달/ 나도향

검지 정숙자 2020. 9. 24. 17:32

 

 

    그믐달

 

    나도향(1902-1926, 24세)

 

 

  나는 그믐달을 몹시 사랑한다. 그믐달은 요염하여 감히 손을 댈 수도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예쁜 계집 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이 저리고 쓰리도록 가련한 달이다.

  서산 위에 잠깐 나타났다 숨어버리는 초승달은 세상을 후려 삼키려는 독부가 아니면 철모르는 처녀 같은 달이지만, 그믐달은 세상의 갖은 풍상을 다 겪고, 나중에는 그 무슨 원한을 품고서 애처롭게 쓰러지는 원부와 같이 애절하고 애절한 맛이 있다. 보름에 둥근 달은 모든 영화와 끝없는 숭배를 받는 여왕 같은 달이지만. 그믐달은 애인을 잃고 쫓겨남을 당한 공주와 같은 달이다. 초승달이나 보름달은 보는 이가 많지만, 그믐달은 보는 이가 적어 그만큼 외로운 달이다. 객창한등에 정든 임 그리워 잠 못 들어 하는 이나, 못 견디게 쓰린 가슴을 움켜잡은 무슨 한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 달을 보아 주는 이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는 고요한 꿈나라에서 평화롭게 잠든 세상을 저주하며, 홀로 머리를 풀어뜨리고 우는 청상과 같은 달이다.

  내 눈에는 초승달 빛은 따뜻한 황금빛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나는 듯하고, 보름달은 쳐다보면 하얀 얼굴이 언제든지 웃는 듯하지만, 그믐달은 공중에서 번듯하는 날카로운 비수와 같이 푸른빛이 있어 보인다.

  내가 한 있는 사람이 되어서 그러한지는 모르지만, 내가 그 달을 많이 보고 또 보기를 원하지만, 그 달은 한 있는 사람만 보아 주는 것이 아니라 늦게 돌아가는 술주정꾼과 노름하다 오줌 누러 나온 사람도 보고, 어떤 때는 도둑놈도 보는 것이다.

  어떻든지, 그믐달은 가장 정 있는 사람이 보는 중에, 또한 가장 무정한 사람이 보는 동시에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많이 보아 준다. 내가 만일 태어날 수 있다 하면, 그믐달 같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 

    -전문/ p. 270-271

 

 

  ▣ 오가렉-최(Halina Ogarek-Czoj, 1931-2004, 73세)는 필생의 역작 『한국문학사』을 폴란드어로 완성했다. 2004년 『Klasyczna Literatura Koreanska(한국고전문학)』을 내고 타계하였다. 대산문화재단의 해외한국문학연구지원을 받아 필생의 마지막 투혼을 불사르며 집필한 이 책이 폴란드에서 출간된 것이다. 동구권 한국학 연구자 중에서 중추적 역할을 맡았던 할리나 오가렉-최 교수는 한국학 연구성과를 총정리하는 마지막 작업으로 한국문학사 집필에 몰두했다. 무려 8년간의 작업 끝에 탈고하고 1권으로Klasyczna Literatura Koreanska(한국고전문학)』을 출간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완결판인한국현대문학』의 출간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작고하였다. 후학들은 한국학 연구에 평생을 바친 오가렉-최 교수가 마무리 짓지 못한 『한국현대문학』을 내기 위해 최종 교정작업 등의 마무리 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한국현대문학』은 3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Klasyczna Literatura Koreanska(한국고전문학)』은 폴란드의 동양학 전문출판사인 디알로그(Dialog)에서 출간되었으며 총3부로 구성되어 있고 202쪽 분량이다. 1부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한국문학을 다루는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향가, 한시, 한문소설, 고려가요 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2부는 1392년부터 1593년까지 조선 전기의 시조와 가사, 한글로 된 작품, 산문 등을 다루고 있다. 마지막 3부는 조선 후기의 시조와 가사, 한시, 산문, 한글소설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한국현대문학』은 오가렉-최 교수의 제자인 바르샤바대학교 한국어문학과 학과장인 크리스토프 야나샥(Christoph Janasika) 교수가 저자를 대신하여 교정을 보았다.

  오가렉-최는 북한에서 공부했지만 남한에도 여러 번 다녀갔다. 1990년에는 연세대 국학연구원에서 '폴란드에서의 한국문학 번역 및 한국학술현황'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 논문을 ⟪동방학지⟫(68호)에 싣기도 하였다. 이 논문은 대산문화재단의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스위스 아시아학회가 펴내는 ⟪아시아 연구 ASsiatische Studien⟫ 34권(1980)에는 Na Tohyang and Sove(나도향과 사랑)」라는 오가렉-최가 영어로 쓴 논문이 실려 있다. 여기에는 나도향의 유명한 수필 「그믐달」이 영어로 일부 번역되어 있다. 한글 원문과 영어 번역분을 비교해 보며 한국문학이 어떻게 번역되면 좋을지를 생각해 보자. (p. 269-270)

 

  할리나 오가렉-최(Halina Ogarek-Czoj)는 1931년 6월 14일 폴란드에서 태어났다. 풀란드로 공부하러 온 최 모라는 북한 유학생을 만나 결혼하고 함께 북한으로 가서 1957년부터 김일성종합대학에서 한국근현대문학을 전공하였으며 '송영의 국문학에 대한 연구'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북한 정부가 외국유학생들을 대거 본국으로 추방하면서 1962년에 남편과 생이별을 하고 외동딸을 데리고 폴란드로 돌아왔다.

  다시 북한으로 가서 남편을 찾으려 했으나 무산되어 세계 유관기관에 호소문을 보냈다. 이것이 역효과를 내어 다시 추방되고 이후 남편을 영영 만나지 못한 채 평생 재혼하지 않고 한국학 연구활동과 후학양성을 생의 보람으로 여기며 살았다. 바르샤바대학 최초의 한국학 담당 교수가 되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열기가 고조될 때 딸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자기가 과연 어느 국적인지 한 맺힌 탄원을 하기도 했다. 주위 사람들은 오가렉-최 교수를 '한국어와 결혼한 분'이라고 불렀다. 딸 안나 코르빈-코발렙스카가 폴란드 현지에서 어머니의 회고록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p. 267)

 

 

   * 블로그주: 이 수필의 영문 및 <작가의 생애>와 사진 등 상세 내용/ 266-272쪽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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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고 지음 『한국을 사랑한 세계작가들 세계의 책속에 피어난 한국 근현대 3』 에서/ 2020. 7. 17. <와이겔리> 펴냄

  * 최종고崔鍾庫/ 1947년 경북 상주 출생, 서울 법대 졸업,  독일 프라이부르크(Freiburg)대학에서 박사학위 받은 후 모교 서울법대에서 33년간 법사상사를 가르쳤다, 많은 학술서를 저술하여 2012년 삼일문화상 수상. 2013년 정년 후에 인생의 대도大道라는 생각으로 시인 · 수필가로 등단, 『괴테의 이름으로』(2017) 등 시집과 문학서를 내었다. 현재 <한국인물전기학회>, <한국펄벅연구회>를 운영하고 <국제PEN한국본부>, <공간시낭독회>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