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역 회로
정채원
터진 풍선에 볼을 비비랴 금간 꽃병을 안고 잠든들 꿈만 젖을 뿐 깨진
항아리는 깨진 항아리, 세상에는 뚜뚜팡팡크크가 존재한다 신이 존재한다
수맥도 자석도 나는 믿지 못하겠다 차라리 너의 모자를 믿는다 모자는 수
시로 변하는 네 눈빛을 가려주는 것 모자는 언제나 같은 표정이다 일관성
있는 것에 나는 열광한다 사용법도 모르면서 아무 단추나 누르지 마라 여
우울음 울지 못하는 여우목도리가 겨울밤 성대수술이라도 한다는 거냐 수
술 칼을 들고 아무 코나 베지 마라 바가지는 바가지 더 이상 지붕 위의 달
빛에 뒤척거릴 수 없다 넓적한 잎사귀를 빗방울에 흔드는 고무나무가 될
수 없어 타이어는 오늘도 아스팔트 위를 달릴 뿐이다 닳아빠질 때까지 구
멍 난 가슴을 안고, 오, 구두여, 너는 무슨 죄로 오늘도 법정에 불려다니느
냐 날짐승과 들짐승 사이에 낀 박쥐처럼 캄캄한 지구에 거꾸로 매달려 말
라가는 장미며, 향기는 네게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
*『현대시학』2012-2월호 <신작특집>에서
* 정채원/ 서울 출생, 1996년『문학사상』으로 등단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의 탄생/ 윤의섭 (0) | 2012.02.19 |
---|---|
북어, 바람을 필사하다/ 송종규 (0) | 2012.02.09 |
법문(法門)/ 홍사성 (0) | 2012.02.09 |
방랑의 도시/ 이재훈 (0) | 2012.02.07 |
가릉빈가/ 김옥성 (0) | 2012.0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