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당신에게 골목의 오후를 드리겠습니다/ 이대흠

검지 정숙자 2020. 7. 26. 16:27

 

 

    당신에게 골목의 오후를 드리겠습니다

 

    이대흠

 

 

  당신의 추억은 모서리에 빛을 담고 있나요? 구리선을 휘듯이 당신 생의 가장 힘든 골목을 구부려 본 적이 있나요 시간을 구부려 꽃을 만들어본 사람은 슬픔으로 케이크를 만들 수도 있답니다 그런 당신에게는 골목 하나를 드리겠습니다

 

  혼자 버려져 있어도 늘 온기를 품고 있는 골목입니다 농협이 있는 큰 길에서 한참을 벗어난 곳입니다 굄돌을 감싼 채송화 꽃이 어린 아이의 웃음처럼 마구 터집니다 오래 전에 버려진 깡통도 녹을 품은 채로 평화롭습니다 아이스크림 껍데기에도 햇살은 번집니다 노랑 의자 하나 구부러진 담장 옆에 있습니다

 

  당신이 견딜 수 없는 그 무언가로 괴로워할 때 이 골목을 드리겠습니다 지친 당신이 아무것도 원하지 않을 때 이 골목의 오후를 드리겠습니다 어떤 비통이나 어떤 슬픔 사이에 책갈피 꽂듯 이 골목을 꽂아 두세요 오래된 책 속의 네잎 클로버처럼 문득 이 골목은 보일 것입니다

 

  발을 내딛어 보세요 손아귀를 벗어난 숭어처럼 이 골목은 펄떡거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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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와문화』 2020-여름호 <정예 시인 신작시 31인 선>에서

  * 이대흠/ 1994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 『귀가 서럽다』, 장편소설 『청앵』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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