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남승원_우리는 서로의 상처(발췌)/ 세화 : 신철규

검지 정숙자 2020. 7. 24. 00:13

 

 

    세화

 

    신철규

 

 

  우리는 끝을 보기 위해 여기에 왔다

 

  흐린 수평선에 걸린 구름이 아랫입술을 깨물고

 

  서서 죽은 물

  허옇게 누운 비석

 

  외계에서 온 사람들

  우리는 서로에게 비밀이 되어

  서로 먼저 등을 돌리라고  재촉한다

  뒷모습을 보여 주기 싫어서

  뒷모습을 들키기 싫어서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 우리는 난민이 될 수 있을까

  마음속에 일어난 난을 피해 우리는 어디로 망명해야 할까

 

  어디까지 망가질지 두려운 사람들이 선을 긋는다

 

  감은 눈 속에서 다시 한 번 눈을 감고

  눈 속의 눈을 감고

 

  입속에 갇힌 수백 마리 나비가 날갯짓을 하고 있다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 앞에서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폭도가 된다

 

  서로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누워 있는 해골을 보았다

  얼굴에서 살이 없어지면

  모두 저렇게 표정이 사라질까

  텅 빈 웃음만 남기고

 

  서로의 고통스런 표정을 참아낼 만큼 그들은 사랑했던 걸까

 

  해변을 걷다 보면  다시 또 여기로 오겠지

  여긴 벗어날 수 없는 한 덩어리의 땅이니까

 

  아이들은 모래사장에 나무 막대기로 그림을 그린다

  두고 온 집과 보고 싶은 사람들을

  윤곽만 남은 얼굴들을

  성급하게 식은 용암은 구멍이 많은 돌이 되고

  몸보다 앞서간 말들은 툭툭 끊기고

  부러진 늑골 같은 구름들

 

  동굴의 입구에서부터 기어온 매캐하고 검은 연기를 피해 도망쳐 나온 사람들은 해변으로 끌려왔다

  그들의 눈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육지일까 바다일까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우리만 볼 수 있는 어떤 빛

 

  해변과 수평선 사이에 당신을 오래 세워두고 싶다

 

  무지갯빛 슬리퍼 한 짝이 파도의 끄트머리에 걸려 밀려왔다 밀려간다

     -전문-

 

 

   * 앤서니 도어의 소설 제목

 

 

  우리는 서로의 상처(발췌)_ 남승원/ 문학평론가

  시인이 서 있는 곳은 세화, "한 덩어리의 땅"에 잘못 그어진 경계가 만들었던 악몽이 여전히 남아 있는 곳이다. "구멍이 많은 돌"을 보면서도 때로는 너무 "성급하게 식은" 모습이라고 탓하며 혀를 차게 만드는 곳. 그렇지만, "해변을 걷다 보면 다시 또 여기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어 외면하지 못하는 곳. 나는 거기에서 시인이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 앞에서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폭도가 된다 

 

  고 한 말을 그대로 옮겨서 남겨두고 싶다. 가능하다면 아주 오랫동안.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를 정당하게 만들어주는 이유에 이상하리만치 집착한다. 마치, 누군가를 죽이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며, 우리의 삶을 최대한 합리적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라는 것을 내세우는 것처럼. 반면에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에게 논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살아간다는 것은 이유가 필요 없으니까. 아이러니한 것은,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악착같이 만들어 낸 논리가 살아남기 위해 행동한 자들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기록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위의 구절은 아주 오랫동안 남아있어야만 한다. 논리를 만들어내는 구조에 내재된 폭력성을 증언하는 말로, 국가가 곧 이성을 체현하고 있다는 말(아우구스티누스)의 허구를 폭로하는 말로, 그리고, 세상에 수없이 잘못 그어져 있는 경계선들에 경고하는 말로, 그래서 나는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폭도가 되어

  살아남으려는 사람들 앞에 서 있다

 

  로 다시 경계선을 옮겨, 시인이 허락한다면, 나란히 남겨두고 싶다. 가능하다면 아주 오랫동안.

  시인의 바람대로 우리 역시 그곳, "해변과 수평선 사이에" 서게 되었다. "무지갯빛 슬리퍼 한 짝이" 그 경계를 넘나들며 움직이고 있다. 그 움직임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세상의 "모든 빛"들이 그 '슬리퍼'에 담겨 있는, 마치 벽사辟邪를 기원하면서 그린 그림歲畵처럼 보인다. (p. 시 107-109/ 론 116-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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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시』 2020-6월호 <현대시가 선정한 이달의 시인/ 근작시/ 작품론>에서 
  * 신철규/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 남승원/ 문학평론가, 201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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