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 위의 책
정숙자
바람이 앉았던 의자에 슬픔이 앉는다
오래 거닌 슬픔을 위해 바람은 자리를 비킨다
슬픔은 내내 낮은 어깨를 하고 있다
낮은 어깨는 그러나 그늘을 입었을지라도
중심을 모아 푸른빛을 고른다
몇 방울 이슬이 쉬어갈 아침을 근심한다
눈물 아니다 슬픔의 방향은
앞날을 향해 있다
눈꺼풀 속에 잊어서는 안 될 풍경이 나타난다
일 나노미터 오차도 없는 두 어깨의 균형
날으는 몸들은 그것을 잃지 않는다
나비! 나비! 나비도 그렇게 하늘을 열었을 게다
그것이 잡히면 울음도 출렁거림을 벗어나는가
바람이 앉았던 의자에 귀 낡은 책이 펼쳐져 있다
얼룩진 행간 사이로 햇살이 들락거린다
팔 랑 팔 랑 두 쪽 날개에 실려
한 생애가 묵묵히 자연으로 돌아간다
-『현대시』2002.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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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열매보다 강한 잎』에서/ 2006.9.25. <(주)천년의시작>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문학정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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