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안영희 산문집_『슬픔이 익다』「동백꽃 현수막」

검지 정숙자 2020. 6. 15. 16:04

 

 

    동백꽃 현수막

 

    안영희

 

 

  이른 4월 인사동 입구에 동백꽃 문양 붉게 찍힌 현수막이 바람에 거칠게 펄럭이고 있다.

  동백꽃, 동 백 꽃······, 입안에서 불러 보다가 일상의 자리 붙박인 채로 마음이 금방 그리움에 찬다.

  해 기울면 서둘러 머플러를 다시 감고 옷깃을 여미도록 세를 타는 바람 아랑곳없이, 어느샌지 단호한 붉음으로 피었다가 꽃잎 하나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뚝, 뚝······ 통째로 떨어지는 낙화의 모습 너무나도 강렬해서, 내 마음에 진홍의 낙관처럼 찍혀 있는 꽃. 남도 어디 섬이라든가 하는 데선 눈 속에 피었다가 벌써 모가지째 떨어져 꽃송이들이 가득히 땅바닥을 덮었다고 올려놓은 사진을 인터넷에서 발견하곤, 벌써 퍼다가 내 카페에도 핸드폰에다도 저장해 놓은 꽃.

  그러나 2019년의 이 4월 별스럽게 쳐 대는 꽃샘바람에 지금 혼신을 다해 펄럭대는 것은 제주의 4 · 3사태 추모제를 알리는 현수막이다.

  무려 제주도민의 8분의 1일 죽임을 당하거나 행방불명이 된 채로, 그 짓이 자행된 지 70주기가 되도록 제대로 달래지 못한 희생자들을, 상징화한 낙화의 문양.

  그동안 살육의 책임이 있는 정권이나 그 미친 학살을 먼 산 보듯 방조한 미군정, 혹은 살육을 직접 자행한 책임자들 중 그 누구에게도 죄를 묻지 않았고, 책임진 일 따위 전혀 없이 가해자들 다 안녕하고 무사하게 살아가거나 더러는 살다가 간, 70년의 이다음 세상에야 댕강댕강 목 잘려 땅바닥을 덮고 또 덮은, 피 붉은 낙화들의 통곡에 귀를 열자는 것이다. 암흑하고도 무도한 이 나라 기막힌 역사 속에서 대부분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구제역의 돼지처럼 겹겹 포개 몰려서 죽임당한 원혼들이,

  "들어다오! 내 피 맺힌 이야기를 제발 좀 들어다오!" 소리치는 듯이, 동백꽃 현수막이 온몸 다해 펄럭대고 있다.

  처녀 적에 건너가 반생 넘게 LA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동생 집에서 몇 년을 살다 돌아오신 아버지는 공항 문을 밀고 나오시며, 마중 나간 내게 말씀하셨다.

  "미국은 참 좋은 나라여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입가가 여지없이 이지러졌다. 정말이지 그 말은, 결코 내 아버지의 입에서 나와선 안 되는 말이었다.

  일찍이 한국전쟁 전서부터 그의 생애는 사회주의 혁명사상, 그 신전에 고스란히 바쳐졌고, 유년서부터 아버지는 우리에게 없는 사람이었다. 허기진 하학길 만두 한 알, 고구마 한 꼬챙이도 아니었고, 엄동에 한 켤레 양말도 아니었으면서, 보호자 난에 단 한 번도 그 이름을 채우지 않았으면서, 이제 보니 미국은 좋은 나라라고? 그러면 처자식 대신 그 무엇에다 생애를 다 바치고 오셨더란 말인가?

  미국은 좋은 나라여야, 라 하신 그 한마디는 스스로의 인생이, 헛되고 헛된 한바탕 공전이었다고 인정한 것임에.

  그날 손수레 가득 채워 밀고 나오시는 미국, 미국의 선물이 얼마나 어이없었던지! 세상을 한 바퀴 돌고 이제는 늙어서 자신이 말한 그 한마디가 제 자식에게 얼마나 커다란 분노를 유발시키고 있는지, 허탈감을 주고 있는지 짐작도 못하는 아버지라니!

  그래 세상이 한 바퀴 돌고 난 후, 그의 젊은 피를 열광시켰던 마르크스, 레닌과 소련이 붕괴되고 우리가 지난날 목을 겨눠 총질해댔던 베트남, 호치민의 나라는 관광하기에 넘 좋은 이웃나라가 되었다.

  무엇이, 사람 사는 세상에 무엇이 영원하던가? 무슨 사상 무슨 이념 따위가 그리 절대하던가? 겨우 서른 살 안팎의 젊은 아버지가 사냥꾼들의 몰이짐승이 되었을 때, 그의 자식인 우리 형제들은 그게 무엇인지 왜인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배가 고팠고 추웠고 깃들 데가 없었다. 얼굴도 모르는 부재의 아버지가 줄곧 번번이 내 인생을 가해하고 있었다.

 

  4 · 3 사건의 희생자, 그 대부분의 사람들도 나처럼 영문 모르고 당한, 권력욕에 눈이 먼 미친 정권, 흑 아니면 백밖에 모르면서 편 가르기엔 재빨랐던 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동물들의 역사, 그 피해자들일 것이다.

 

  산골 마을에 작은 집 한 채를 짓고 오가며 사는 동안, 내가 사는 한 세상이 숱한 다른 생명체들과 함께 살고 있음을 번번히 인지하곤 했다.

  아무리 망사창을 해 달았어도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곤충이며 거미, 창에 온몸을 펼쳐 붙어 있는 색색의 나방들도 쉽게 파리채를 들어 때려죽일 수가 없었다. 집어 휴지에 싸거나, 가만 쓸어 밖으로 내버리며,

  "미안해, 미안해 밖에 가서 살아야지, 밖에 가서." 중얼거리곤 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침입자가 아닌가. 그들의 오랜 터전에 내가 땅을 깎고 집을 지어 든, 저것들도 나와 같이 한 세상 살아갈 권리를 부여받고 태어난 생명체들이란 생각이 때때로 마음을 쳤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사람의 세상에 불변하는 것, 절대영원이란 애초에 없는 것인데, 우리 아버지의 사상 색이 흰지, 붉은지, 초록색인지 그 색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따위 하나도 아는 바 없는 어린아이인 내가 앗겼던 포근하고 따사로운 유년, 가혹한 소외와 박탈이 한갓 유한하고 가변하는 정권, 한 시절의 지배이념 따위가 절대가치인 듯 숭앙하며 의심치 않고 저지르고 간 가해일진대, 하물며 그 칼로 우우우 우거진 풀을 베듯이 누군가의 부모, 무군가의 자식, 햇살 같은 어린아이들의 목을 베고도 아무 일 없었다고 칼을 씻어서는 안 되지 않는가? ▩ (p. 10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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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영희 시인의 산문집 『슬픔이 익다』에서/ 2020. 6. 15. <문예바다> 펴냄

* 안영희/ 전남 광주 출생, 1990년 시집 『멀어지는 것은 아름답다』로 등단, 시집 『물빛 창』 『어쩌자고 제비꽃』 등, 2005년 경인미술관에서 "흙과 불로 빚은 시" 도예개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