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최상섭

검지 정숙자 2020. 5. 13. 02:08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최상섭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나는 스크럼을 짜고 익산역으로 돌진하는 데모대에 끼어 데모다운 데모를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로 인해 눈에 보이지 않는 배신감을 안고 늘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내 처지가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대학신문사 기자라는 신분과 장학금을 타야 대학을 다닐 수 있는 불우한 환경이 나를 비겁자로 옥죄였고 늘 가슴의 응어리로 남아 슬픈 기억으로 치장해야만 했다. 그때 우리는 창인동 골목에서 밤새도록 막걸리를 마시면서 신문에 쓸 수 없었던 한과, 울분을 토로했고 그래도 비겁자가 되지 않으려고 사진을 찍어 데모대의 모습을 대학신문에 생생하게 그대로 실었다가 어느 곳에 붙들려가 밤새도록 취조를 받았고 다시는 그런 기사를 쓰지 않겠다는 각서를 쓴 후 풀려날 수 있었다. 나는 그때를 잊을 수가 없다. 처음 써 보았던 각서며 그 육모 방망이 앞에서 벌벌 떨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던 지난 시절을 황지우 시인의 「비화飛火하는 불새」가 너무도 깊은 정곡을 찔러 지금도 그 시를 애송하고 있다.




   비화飛火하는 불새 / 황지우


  나는 그 불 속에서 울부짖었다

  살려달라고

  살고 싶다고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불 속에서 죽지 못하고 나는 울었다

 

  참을 수 없는 것

  무릎 꿇을 수 없는 것

  그런 것들을 나는

  인정했다

  나는 파드득 날개쳤다


  冥府명부에 날개를 부딪치며 나를

  호명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너지겠다고

  약속했다


  잿더미로 떨어지면서

  잿더미 속에서

  다시는 살[肉]로 태어나지 말자고

  부서지려는 질그릇으로

  

  날개를 접으며 나는

  새벽 바다를 향해

  

  날고 싶은 아침 나라로 

  머리를 눕혔다

  日出일출을 몇 시간 앞둔 높은 창을 향해 

    -전문-



  황지우(1952~)의 시 '飛火비화하는 불새'에 나타나는 새는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새로 500~600년마다 한 번 스스로 향나무를 쌓아 불을 피워 타죽고 그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고 하는 불사조(phoenix)의 이미지를 띤다. 시인이 유신 반대 시위, 1980년대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취조, 고문을 당했던 당시의 극한 상황을 타오르는 불 속에 뛰어든 불새로 비유함으로써 노화老化를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불을 피워놓고 그 속에 뛰어들어 다시 젊음을 되찾는 불새의 이야기와 병치竝置하고 있다. 시적 화자가 취조와 고문을 당하면서 생과 사의 아슬아슬한 경지까지 갈 때에 사람의 몸과 으식이 얼마나 무너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한계 상황 속에서 어떻게 저승을 응시하게 되는지를, 고통스러운 고문 과정을 통해 보여주고 있고 동시에 불새가 재생을 위해 불 속에 스스로 몸을 던져 날개를 파닥이면서 타죽고 불가마 속의 질그릇처럼 다시 구워져 태어나는 죽음과 재생의 드라마와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김옥순/ 국립국어연구원)


  그런데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의 가사는 우리 고장 전북 부안 출신 박영근 시인의 시집 『취업 공고판 앞에서』가 인용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1958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전주고를 중퇴하고 노동자로 일하던 박영근은 1981년 '반시(半詩)"  제6집에 시 '수유리에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박 시인은 시집 『취업 공고판 앞에서』『대열』, 산문집『공장 옥상에 올라』등을 펴냈다. 제12회 신동엽창작기금()과 제5회 백석문학상 등을 받았다.

  부평에서 거주하던 방영근 시인은 가낭 등으로 건강을 잃어 2006년 5월 11일 결핵성 뇌수막염과 패형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불후한 생을 살다간 박영근 시인의 시 세계를 이제 전북의 문인들이 베일을 벗겨 그의 문학성을 조명할 때임을 밝혀두고 싶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 노래 안치환


  거센 바람이 불어와서

  어머님의 눈물이

  가슴 속에 사무쳐 부는 갈라진 이 세상에

  민중의 넋이 주인 되는

  참세상 자유를 위하여

  시퍼렇게 쑥물 들어도

  강물 저어 가리라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마라


  창살 아래 내가 묶인 곳

  살아서 만나리라

    -전문-



  우리에게 5월은 늘 뜨거운 혁명의 계절이었다. 1987년 연세대 노래패인 울림터 멤버였던 안치환(당시 연세대 사회사업과 재학)은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한 모 후보로부터선거 유세에 쓸 노래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평소 민중 시인 김남주와 박노해 시를 탐독했던 안치환은 지명수배를 받고 쫓겨 다니는 노래패 선배의 아픔을 떠올리면서 고스란히 이 노래에 담았다. 그 진심이 통해서였는지 이 노래는 대학가에 구전되면서 이내 유명해졌다. 대학가 시위 현장, 노동자의 파업 현장에서 빠지지 않는 운동권 가요가 되었다. 어머니, 쑥물, 참세상, 샛바람, 창살 등의 단어가 주는 강렬함과 서정적 선율이 어우러져서 자유를 외치던 가슴을 뒤흔든 것이다.


  대학가요제에 출전하기 위해 대학에 입학했던 안치환은 시대적 요구에 의해 민중가수가 된 셈이다. 이후에도 안치환은 정호승의 '우리가 어느 별에서' 나희덕의 '귀뚜라미' 등을 만들면서 시인들과의 인연을 이어간다.


  안치환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서 활동하다가 1989년 솔로로 독립했으며 1995년 한국프로듀서연합회 선정 가수상과 1999년 문화관돵부 대중가요 부문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했다.


  '솔아 솔아 푸른 솔아' '광야에서' '내가 만일' 등 우리네 삶을 꾸밈없이 담백하게 노래하고 있는 안치환은 특히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위하여' 등으로 우리 가슴에 깊숙이 파고들어 사랑을 받고 있다.


  나는 솔아 솔아 푸른 솔아의 노래를 들을 때면 현기증과 멀미로 황지우의 비화하는 불새가 된다. 아직은 내 가슴에도 반체제에 불가마 속의 질그릇처럼 저항하려는 의식이 살아 용솟음침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 고장 부안의 박영근 시인의 애절한 삶이 원통해서일까를 서녘 하늘로 지는 노을에게 물어보고 싶다.

                                                                                                                                 (2018.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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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필집 『청동화로』에서/  2020.4. 17. <인문사> 펴냄

  * 문곡文谷 최상섭崔相涉시집『까치집』『까치의 노래』등, 수필집『청동 주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