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의자
강신자
잔잔한 햇살이 베란다를 통해
마루까지 길게 뻗은 오후
졸음에 겨운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그림책을 펼친다
윤아야, 이 나무들 좀 봐
예쁜 꽃에 풀들도 있네
나비들이 많기도 하구나
몇 마리인가 세어 볼까
하나 둘 셋 넷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다 잠든 사이
나비들은 순식간에 떼 지어 날아올라
동쪽바다 가까운 작은 읍 오십천 천변
유채꽃밭에 내려앉는다
노랗게 흔들리는 유채꽃
그 속에 바람이 되고 별이 되고
강이 되어 흐르고 싶었던
외로운 소녀가 부옇게 보이고
온통 샛노란 꽃들이
어지럽게 피어난 강변에
아무것도 아닌 채로
이룰 수 없는 꿈만 꾸다가
이제야 모든 것 내려놓고
잎 넓은 나무 그늘 아래
지친 이 쉬어 가는 빈 의자를 꿈꾸는
수수한 아낙의 미소 띤 모습이
또렷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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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문학』 2020-2월호 <시> 에서
* 강신자/ 2015년 『한맥문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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