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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민
고라니가 지나갔다
진흙은 발자국의 깊이를 가늠하고 있었고 나는
깨진 체온계의 수은이 구슬처럼 굴러다니던 아침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주워 담을 수 없게 된 날이었다
혹, 고라니의 발자국을 지워 버린 곳곳의 웅덩이가 사라진 숲의 홀로그램이라면 그날 아침 숲에서 사라진 건 고라니인가 알 수 없는 그림자인가 혹, 그날 그 숲의 흔적이 숲의 체온이라면 숲은 슬픔과 엇비슷한 감정에서 어떤 속도로 복원되는가
흙탕물이 가라앉는 속도
늪에 던져진 돌멩이를 잠시 피했다 모여드는 개구리밥의 속도쯤일지도 몰라
그러니까 이미 지나가버린 고라니의 발자국은 알 듯 말 듯한 이곳과 저곳 사이에 나타나는 간섭무늬 그래서 고라니가 비가 내린 숲 여기저기 흔적을 남겼던 것일지도 몰라
밟힌 풀들이 일어서는
그만큼의 속도로 발자국은 아직도 고라니인가
생각에 잠긴 진흙 한 줌
그날은
삼백 년 전에 죽은 한 남자가
한 소녀의 꿈에 나타나 자신이 묻혀 있는 곳을 상세히 알려 주던 날이었는데 나는 체온을 재다 말고 까르르 까르르 달아나는 구슬을 따라다녔던 것이다
붙잡을 수 없는 아침 숲 어딘가에 본 적 없는 고라니가 있어 발자국은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며 그날의 적적함을 재현해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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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파란』 2019-가을호 <poem/ 신작> 에서
* 신정민/ 2003년 《부산일보》로 등단, 시집 『저녁은 안녕이란 인사를 하지 않는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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