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진화론/ 조우연

검지 정숙자 2020. 2. 13. 02:54



    진화론


    조우연



  길고 긴 고독에 적응하기 위해

  기린은 긴 목을 갖게 되었다


  고래는 지독한 고독에 살아남기 위해

  뭍을 버리고 심해로 들어가

  수억 년 동안 잠수 중이다


  강대나무가 적막하다

  주목은 산정에서 고독과 싸우다 선 채로 죽는 진화를 택했을 것이다

  아직 가닿지 못한

  달팽이의 더딘 쓸쓸은 지금도 진화 중이다


  인류는 나를 항거했다

  고독에 잡히지 않으려 꼬리를 도려내고

  날개를 잘라 바람 속 공허에 맞섰다

  그러나 끝내 고독에 순응하여 거대 독무덤에

  무진장 고독하게 묻힌 조상이 있었다


  다윈, 저녁을 혼자 걷는 그의 직립보행은 퇴행을 걷고 있었을 것이며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고흐는 고독에게 총을 겨누고 죽었지만

  그 남자의 고독은 무한 복제되고 있다


  지금 뭐해, 비, 비가 오네, 라든지

  아니, 별 별일 아니고, 달이 떴는데, 그게, 그냥, 참, 그래서…… 등등

  우리가 저녁밥을 혼자 먹으며

  퇴화 중인 언어를 더듬거릴 때

  아, 이런, 고독사의 전성시대


  인류 출현 이래

  고독은 보란듯이 전화 중인 것이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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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동네』 2020-2월호 <신작시 # 1> 에서

  * 조우연/ 2016년《충북작가》로 등단, 시집 『폭우반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