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휘민_ 시의 얼굴과 말 사이의 거리(발췌)/ 혈액이 흐르는 외투 : 이대흠

검지 정숙자 2020. 2. 13. 02:36



    혈액이 흐르는 외투


    이대흠



  언제 밥 한 번 먹자라는 말의 순도는 친밀도와 비례합니다 공식입니다만 공식적인 것엔 도금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가까이 사는 나무의 잎들은 빈번히 접촉하지만 서로의 영양분을 공유하지는 않습니다


  틈 될 때 커피 한 잔 하자는 말보다는 언제 잠깐 몸 좀 빌려 쓰자고 하는 게 낫습니다 택배 차량에서 잠시 만났다 헤어지는 화물들처럼 우리는 만나고 이별합니다 몸만 사용하는 게 가능하지 않다면 감정은 혈액이 흐르는 외투일 것입니다 감정을 벗고 만날까요 어떤 경우에도 감정을 전당포에 맡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가슴 뛰는 설렘 속에는 이미 괴로움이 발생했습니다 그림자는 향기를 복사하지 못합니다 마음은 바빠서 몇 생을 후딱 딴 살림 차렸다가 돌아오기도 합니다 시소의 양 끝에 놓인 듯 오르내리는 감정들을 바라봅니다

    -전문-



  ▶ 시의 얼굴과 말 사이의 거리(발췌)_ 휘민/ 시인, 동화 작가  

  일반적으로 감정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심리 상태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마샤 누스바움은 다른 방식으로 감정을 정의한다. 그는 감정을 이성과 분리시키려 했던 스토아학파의 오류를 논박하면서 감정이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대상에 대한 가치판단과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로써 감정 또한 인간의 이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시사한다. 시인의 사유 또한 여기서 멀지 않다. "택배 차량에서 잠시 만났다 헤어지는 화물들처럼" 만남과 이별이 잦은 현대인의 삶 속에서 타인과 맺는 깊이 있는 관계는 점점 요원해지기 마련이다. 저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 몇 개의 가면을 걸치고 사는 것이 일상다반사가 되어버렸다. 그런 까닭에 친밀감을 가장한 "언제 밥 한 번 먹자"는 말 혹은 "틈 될 때 커피 한 잔 하자는 말"은 진심이 실리지 않은 껍데기일 공산이 크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관계의 위선과 허위를 시인은 주목하고 있다. 그래서 화자는 "몸만 사용하는 게 가능하지 않다면 감정은 혈액이 흐르는 외투일" 거라고 말한다. 인간의 가장 내밀한 속살 속에 흐르는 혈액과 몸의 바깥에 위치한 외투의 이질적인 조합은 이렇게 "향기를 복사하지 못"하고 그림자로만 남은 시뮬라크르의 세계를 풍자한다. 결국 관계는 사라지고 관계를 지향하는 가면의 욕망이 "도금된" 인격이 되어가는 현실을 해부하고 있는 것이다.(p. 시 22/ 론 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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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동네』 2020-2월호 <특집/ 신작시/ 작품론> 에서

  * 이대흠/ 1967년 전남 장흥 출생, 1994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등, 장편소설 『청앵』, 산문집 『탐진강 추억 한 사발 삼천 원』『그리운 사람은 기차를 타고 온다』등

  * 휘민/ 2001년 《경향신문》신춘문예로 시 부문 & 2011년 《한국일보》신춘문예로 동화 부문 등단, 시집 『생일 꽃바구니』『온전히 나일 수도 당신일 수도』, 동화집 『할머니는 축구 선수』, 그림책 『빨간 모자의 숲』『라 벨라 치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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