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본색원拔本塞源
고정애
루벤스의 그림
<유아 대학살>을 본다
여기저기 흩어져 널브러진 아기들
새파란 낯빛으로 울부짖는 어미들
기원전 4세기 유태의 왕 헤롯의 유아 대학살을
정밀 묘사한 지옥도,
옛 왕조시대 삼족을 멸했던 참상을 떠올리다가
질경이, 망초, 달맞이꽃, 바랭이, 강아지풀, 여뀌, 냉이
모조리 잡초라는 죄목을 씌워 여지없이
호미로 꼬챙이로 뿌리까지 뽑아내는
손을 본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시인은 바로크의 거장인 플랑드르의 화가 루벤스의 <유아 대학살>을 보고 곧바로 "기원전 4세기 유대의 왕 헤롯의 유아 대학살을/ 정밀 요사한 지옥도"임을 알아차린다. 물론 "새파란 낯빛으로 울부짖는 어미들"에게 시선이 머물기도 하지만, "삼족을 멸했던 참상"의 역사 지식을 건너 오늘의 시선은 "질경이, 망초, 달맞이꽃, 바랭이, 강아지풀, 여뀌, 냉이/ 모조리 잡초라는 죄목을 씌워 여지없이/ 호미로 꼬챙이로 뿌리까지 뽑아내는/ 손"에 오래 머문다. "손을 본다" 했으니 최소한 지금 이 순간의 시인의 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어떤 텃밭에서는 가능했을지 모를 일이다./ 인용 작품은 군더더기 없이 짧고 정갈하지만, '그림(유아 대학살)→ 역사(참상)→ 현상(잡초)'을 '발본색원'이라는 제목의 의미로 관통하는 시각은 날카롭다. 이는 주로 사자성어가 제목인 다른 작품들, 「절차탁마切磋琢磨」, 「오불관언吾不關焉」, 「만시지탄晩時之歎」등과 「손자병법孫子兵法」, 「각자도생」등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한결같은 특징이다. 작품의 주제와는 별개로 주목할 만한 창작기법인데, 대체로 이런 수법은 시인의 직접 발화나 시적 화자의 적극적 개입 없이 작품을 그저 보여줌으로써 어떤 사태나 의미를 환기하고자 할 때 주로 사용한다. (p. 시 17/ 론 9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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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날마다 돌아보는 기적』에서/ 2020. 1. 17. <문학의전당> 펴냄
* 고정애/ 1991년『시와의식』으로 등단, 시집『사랑 에너지』『튼튼한 집』등, 일역서 박제천 선시집『장자시莊子詩』, 공역서 김남조 선시집『신의 램프』, 김남조 꽁트집『아름다운 사람들』, 한역서 강상중『재일在日 강상중姜尙中』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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