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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의 법통(法統)과 신채호의 희생/ 임상석

검지 정숙자 2019. 10. 2. 20:03

 

 

    임시정부의 법통法統과 신채호의 희생 

 

    임상석/ 부산대 점필재연구소 교수

 

 

  1. 이루지 못한 부정父情

  한국 헌법의 전문에는 임시정부의 법통이 헌법 이념의 한 기원임을 명시하고 있다. 법통은 정통성과 통하는데 희생으로 보장되는 동시에 이를 거쳐서 얻어진 전문의 다른 대의들 곧, 민주와 자유 및 기회의 균등 등의 새로운 지향을 담은 것이라 생각한다. 신채호(호/단재, 1880-1936, 56세)는 임시정부의 대표자가 된 적은 없으나 희생을 통해 이 새로운 이념과 지향에 다다른 대표적 사례이기에 법통을 대변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단재의 연표나 사후적 증언을 읽는다 해도 그가 겪은 엄청난 고초를 알기는 어려울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중에 가장 괴로운 대목은 일제에게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있던 50대에 부인 박자혜 여사에게 둘째 아들은 '할 수 없으면 고아원에 보내라'는 편지를 보냈다는 일이다. 입신의 기회를 준 은인 신기선이 일진회에 입회하였다는 이유로 개인보다 민족이 우선한다는 공개 절교장을 《대한매일신보》에 발표했던 만큼 유난한 길을 걸었던 단재이지만, 평범한 아버지이기도 했다.

  절교장을 발표한 그 무렵, 곧 첫아들이 태어난 20대 후반의 1909년 그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비싼 분유를 대량으로 사서 비축했는데 이것에 체한 첫아들을 잃게 된다. 단재가 단장의 심정으로 흰 분유를 개천에 쏟아버려 서을 시내의 개천이 하얗게 흘렀다는 일화가 있다. 그의 분노는 첫째 부인 풍양 조씨에 향해서 위자료 격으로 전답을 사주고 이혼하게 된다. 항상 민족이나 대의를 가족의 위에 두었음에도 애끓는 아버지의 정이 남만 못했던 것이 아니었건만, 그는 평생 가족의 행복을 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넉넉하지 못한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당대를 기준으로 매우 높은 경지의 문화 자본을 휙득하였다. 학부대신 신기선의 인정을 받아 10대 후반에 성균관에 입학했으며 여기서 당대의 한학漢學 대가 수당 이남규의 인정을 받게 된다. 그가 평범한 가장을 선택했다면 그 길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현재의 우리는 되새겨야 하고 그가 포기한 기득권을 기억해야만 한다. 이것이 헌법 전문의 법통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길이 될 것이다. 그가 찾은 새로운 대의는 희생에서 비롯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500년은 과저제도, 그 중에서도 대과大科라는 희망이 유지시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말기의 세도정치는 갈수록 좁아지던 바늘구멍 같은 이 희망을 완전히 막았기에, 당대의 대표적 문한文翰 대신 박규수인정을 받은 경화사족 유길준조차 대과를 통과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폐색의 상황에서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국가의 공식언어가 국문이 된 것은 일단 긍정적 전환이었으나, 대한제국이란 허장성세처럼 과거제도의 대안도 제도적인 국문도 형성되고 있지 못한 실태였다. 학부대신 신기선과 한학 대가 이남규의 인정이란 대과 급제나 현재의 고등고시 합격에 해당하는 자격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인정은 전적으로 조선왕조를 유지했던 한학漢學의 능력에서 비롯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한문을 벗어난 언론인 · 작가의 길을 가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이자 입신의 기틀인 성균관을 버린다.

  이 글은 신채호가 언론인과 작가로서 공적 활동을 시작한 대한제국기를 중심으로 그가 자발적으로 포기한 기득권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 그 대신 그가 모색한 대의가 무엇이었는가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2. 일제 귀족을 절교하고

  출처出處의 의리를 개인의 결정적 평가기준으로 삼는 조선시대의 전통이 아직 굳건하던 대한제국에서 단재에세 입신의 기회를 준 신기선을 먼저 살펴본다. 지금은 크게 기억되는 이름이 아니지만 당시에 대표성을 가진 인사였다. 다른 친일 유림을 제치고 이토 히로부미의 거대한 찬조금으로 구성된 친일 유림단체 대동학회大東學會의 회장이 되었고, 이 자리는 대사성이었던 홍승목이 이어받았다. 일진회에도 관여하게 되는 신기선은 그러나 이완용처럼, 처음부터 일제에 부역하는 입장을 지녔던 것은 아니었다. 단재도 "남들이 들어간다 해도 그대만은 일진회에 들지 않으리라 믿었다"(「여우인절교서與友人絶交書; 벗과 절교하는 서간」), 《대한매일신보》, (1904.4.12.)라고 서술하였다. 그는 젊은 시절의 단재에게 다양한 서적을 전해주며 스승 역할을 했다고 한다. 신기선은 기존의 성리학을 바탕으로 동도서기의 지평을 구상하기도 했고 뒤에는 전제권 강화의 일환으로 폐지된 참형의 부활을 주장하며 고종의 충신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단재는 이런 신기선이 "민영환최익현은 헛되이 자기 몸을 버렸고 이완용송병준한때의 영웅이라"하여 의아했으나 일진회에 가입할 줄 몰랐다고 한다.(「여우인절교서」)

  신기선은 일제강점 직전에 죽었기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았으나 그의 후임인 대동학회 회장 홍승목이 일제에게 작위를 받은 사실을 보면 그도 이와 같은 경로를 걸었을 것이 확실하다. 이완용이 당대 유림이자 대한제국 대신의 대표로 오명을 뒤집어쓰고 치욕적인 근친상간의 추문까지 받기에 이르렀으나 이런 구설수에 오르지 않고도 더 영리하게 일신과 가족의 행복을 누린 이들이 적지 않다. 신기선도 그중의 하나가 충분히 될 수 있었다.

  대표적 친일단체인 대동학회에 대한 후원금은 총액 22만 원 정도였고 1908년 대한제국 전체의 세출이 1천 9백만 원 정도였으니, 국가 전체 세출의 1% 이상을 한 단체에서 사용한 격이다. 일제에 대한 협력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다양한 이점은 이처럼 엄청났다. 다른 사례를 들어보자.

  신기선과 한때 같은 왕명 편찬사업에 참여했던 김덕한(金德漢 1874-1946, 72세)이란 인물이 있다. 안동 김씨 세도가의 일원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기 직전에 대과에 급제하고 보호국 체제가 시작된 1906년경에 울산 군수를 역임하였는데 여기 진출한 일제 포경회사 자본과 결탁한 증거가 명확하다. 포경회사가 일본 본토의 직업 스모 선수까지 동원한 대회를 열어 그를 대접하자 그도 이 회사 중역들을 울산 관아에 초청하여 관기와 악공을 대규모로 동원한 칼춤 공연으로 응답한다. 이처럼 큰 자본이 투여된 향응이 대한제국 어업 자원과 연결된 것이라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는 총독부 설립과 동시에 중추원 의원으로 임명되고 후에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김덕한은 일제의 귀족이면서도 일종의 매관자본 역할을 수행하여 개인적인 이권과 사회적 명예를 획득한 것을 알 수 있다.

  단재는 신기선이나 김덕한 같은 일제 귀족들의 세계에 편입되어 가족을 보존할 수 있었다. 적극적으로 그들의 앞잡이가 되지 않는다 하여도, 이미 갖춘 한학의 능력을 적당히 발휘하면 일신의 안위와 가장으로서의 행복을 누리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라가 바뀌었다고 해도 유림과 한학 지식인이라는 정체성이 바뀌는 것이 아니므로 그들의 네트워크는 서간 왕래, 서발序跋과 묘도문자 창작, 한시漢詩 시회 그리고 경서經書 강독으로 유지되었다. 단재가 적극적 친일부역에 나섰더라면 중추원 의관이나 일제 귀족까지를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기존의 한학에 근거한 문화 행위를 통해 일가를 충분히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문 능력과 한문전통에 근거한 문화 행위라는 자신의 기득권과 재능을 버리고 국문의 세계로 나아갔던 것이다.  

 

 

  3. 식민지 언론인을 거부하고

  대한제국의 공식문자는 국문이고 한학에 근거한 과거제도도 철폐하였지만 기득권의 인적 교류는 여전히 한문전통을 따르는 문화 행위로 유지되었다. 신채호는 한학을 통해 입신의 기회를 잡았으며, 대가의 인정을 받은 만큼 기존의 한문 장르인 서간, 서발, 묘도문자 등에 대한 재능을 갖추고서도 이를 공식적으로 창작하지 않았다. 대신에 기존의 한문 문화 행위가 민족의 위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 낡은 유산임을 천명하고 그에게도 미지의 영역이었던 국한문과 국문의 글쓰기로 나아갔다. 그러나 새로운 민족의 정체성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역시 한학과 한문의 세계를 완전히 버릴 수 없었다. 한국인이 작성한 대부분의 중요문헌은 한자로 되어 있고 새로운 세계의 이념과 정보를 선취하기 위해서도 한문이 필요했다. 신채호장지연, 박은식 등에게 양계초를 비롯한 중국의 새로운 문서들이 가졌던 막대한 영향력은 다시 말할 나위가 없다.

  한문과 한학의 세계는 대한제국기에 이중적 성격을 가진 것이었는데, 이는 단재의 『을지문덕』에 잘 나타난다. 『을지문덕』은 순국문판과 국한문판의 두 가지로 발행된다. 후자가 원본에 해당하며 전자는 역자를 따로 두고 번역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이 두 책에서 흥미로운 점은 후자의 장정과 편집 양상이 조선시대의 문집과 동일한 것에 비해 전자는 이른바 딱지본 고소설과 유사한 형태로 발간되었다는 점이다. 한문을 경계로 나누어진 언어계층의 질서는 출간의 형태에도 반영된 것으로 결국 한문의 비중이 높은 국한문판이 순국문판보다 훨씬 비쌌다. 한문을 읽을 수 있는 계층의 구매력이 읽을 수 없는 계층에 비해 높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아직은 그들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대한제국이었다. 국문의 비중을 확장해 한문 중심의 언어생활을 넘어서야 했지만, 한문에 근거한 지식과 문화가 여론을 주도하는 계층들의 지표인 점은 여전했던 것이다.

  단재는 여성을 독자로 설정한 《가뎡잡지》의 편집을 담당하면서 순한글 글쓰기까지 시도한다. 그리고 『을지문덕』등의 대한제국기 저작을 보면 장지연, 박은식과 달리 전통의 경사자집을 거의 인용하지 않는다. 한문과 한학의 지식을 한국사와 새로운 이념의 모색을 위해 사용하지만, 조선시대의 한문전통과 거리를 분명하게 유지하려는 태도이다. 단재가 국문 위주의 언어 생활을 구상했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을지문덕』의 이중 판본의 출간 형태와 가격 설정에서는 한문 지식을 경계로 한 계층화 현상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만큼 국문은 언어계층이란 언어현실을 돌파하려는 이념의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신채호는 한문과 한학이라는 입신의 기반이자 일제 귀족 세계로 가는 기득권을 포기하고 국문에 근거한 언론이라는 세계를 새롭게 도전하여 일정한 성과를 이룩했다. 그러나 총독부의 설립과 함께 다가온 일제강점기에 그는 이 국문 언론이라는 세계마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신기선으로 대표되는 일제 귀족의 세계를 단절한 후 단재에게는 무조건 해외망명의 선택지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식민지 체제 내부에서 한글로 된 언론과 출판 및 자국고전의 세계를 운영했던 최남선신문관이나 광문회 같은 공간도 그에게 가능했고, 성균관 동학인 변영만과 같이 일제에 협조하지 않으면서 한문 문화행위를 통해 인적 네트워크를 유지하는 방향도 있었다. 후자를 선택했을 경우, 단재에게 위당 정인보벽초 홍명희 같은 인사들과의 밀접한 교류가 구성되면서 망명의 길에 비해 개인적 고초는 훨씬 덜했을 터이다. 그러나 단재는 그의 국한문체 언론 선배들인 박은식, 장지연처럼 해외 망명을 선택하게 된다. 그 길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는 중도에 포기하고 귀국하여 일제에 대한 태도와 논조를 바꾼 장지연의 말년이 증명한다.(그러나 대의를 위해 기득권을 포기하고 목숨을 건 망명까지 감행한 그의 성의나 새로운 언론과 국문을 위한 업적을 평가 절하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단재가 최남선의 협조자가 되거나 후배인 변영만과 비슷한 소극적 비타협의 길을 걸었다면 가족의 행복을 지킬 수 있는 가능성은 훨씬 컸을 것이다. 단재는 신기선에게 공개 절교를 선언한 것처럼, 보호국 체제에서 가능했던 국문이란 명칭이 총독부 설립과 함께 일본어로 바뀌게 된 것을 용인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혹독한 검열과 탄압 아래에서 신문관처럼 한글을 사용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은 국문이 아니었다. 성균관을 떠났던 것처럼 단재는 국문 언론이란 자신이 성취한 공간을 떠나 중국에서 《천고天鼓》같은 한문 잡지까지 발행하면서 중국인들과의 당대적 소통까지 시도한다. 단재가 체제 내부에 남았다면 그는 가족의 행복이나 아버지의 정을 이룰 수 있었겠지만, 아마 『조선상고사』나 「조선혁명선언」그리고 「용과 용의 대격전」같은 경지를 얻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4. 평등이라는 대의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허위적 선전의 원조에 해당하는 것이 대한제국 시대의 동야주의이다. 일제가 동양의 보호자이자 중심으로 중국과 한국 같은 약소국을 평화적으로 원조하는 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보호국의 지식인들에게 강력한 유혹이었다. 박은식과 장지연 그리고 그들이 대변하는 대한자강회 역시 동양주의에 대해 전반적으로 동조하는 입장이었으나 단재는 동양주의가 가진 부작용에 대해 가장 엄격한 경고를 남긴다. 민족의 독립에 대해 그 누구보다 치열한 탐구와 모색을 했기 때문이리라 하겠다. 그러나 당시의 신채호는 군국주의의 폐해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둔감한 편이었으며 그러므로 평등이란 대의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단재와 함께 이남규에게 인정을 받을 만큼 한문 문장가이면서 변호사 자격까지 취득해 대한제국 동도서기의 대표였던 변영만은 선구적으로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의 위험을 진단한 「20세기 괴물 제국주의」를 역술해 출간했다. 이 책의 서문에서 단재는 한국도 제국주의 괴물이 될 날을 기대한다는 취지의 문장을 남긴다. 저자 변영만의 본의에서 다소 어긋난 이 서문은 그만큼 단재가 민족의 국수國粹를 최우선으로 삼고 인민의 평등에 대해서는 주의를 덜 기울였다는 증거이다.

  이는 박은식과 같은 선배나 최남선 같은 후배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입장으로 당시로서는 유별난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기존의 성과를 떠나 민족을 위한 더 나은 가치와 가능성을 찾았던 단재는 중국이라는 낯선 공간에서도 당대적 소통을 멈추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넓고 높은 모색을 더해갔다.

  망명의 고난 속에서 그는 민족이 단일한 구성원으로 아루어지지 않았으며 단일한 국수로 귀속하거나 환원하기 전에 평등을 우선해야 한다는 경지를 깨닫게 된다. 평등의 가치는 일제에 대한 비타협 속에 출간된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가 포함하지 못했으며 임시정부의 대표적 지도자 김구도 다소간 배려하지 못한 것이다. 민족의 국수가 최우선이 될 때, 민족의 혼종성과 불평등이란 실상이 가려지고 민주와 기회균등이란 가치가 축소된다. 1910년대 중반까지 단재는 국수주의에 경도된 역사 서술을 시도하나 1922년에 이미 「조선혁명선언」을 통해 평등의 문제를 제시하게 된다. 단재를 이어 1910년대 한국 언론과 출판의 주역이 된 이광수와  최남선 등은 그와 달리 근대 교육을 체계적으로 이수한 세대였다.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 아래서 최남선과 이광수가 한국어와 한국 문학을 위한 노력과 성과를 평가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들은 민족의 불균등한 실상을 호도하며 평등의 가치를 체계적으로 배려하지 못한 것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단재가 서구 과학을 체계적으로 이수한 이들보다 더 앞장서서 평등의 가치를 발견한 것은 일제의 외부에 서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최남선과 김성수 같은 자본가 그리고 그들의 조력자였던 이광수와 달리 자본주의의 외부를 성찰하였기 때문이다. 단재가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 등을 통해 민족의 국수가 아닌 기회균등을 모색하던 때에 이광수는 한국소설의 기념비 『무정』을 선보인다. 지식인과 교육이 없는 사람들 모두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졌던 이 작품은 그러나 보편적 인권이나 기회균등에 대한 인식에서는 거의 반세기 전에 나온 후쿠자와 유키치의 『학문의 권장』단계와 큰 차이가 없다.

  『무정』에서 자살을 시도한 영채가 병욱에게 구원받고 교육을 통해 신지식인으로 부활하는 것은 소설 속에서 정조를 빼앗긴 여성이 생명을 유지하는 놀라운 사건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의 유지가 지식의 습득이란 전제조건으로 가능하다는 점에서 보편적 인권의 기회균등에는 미달했다고 할 수 있다. 선천적 차이에 따른 차별은 거부하나 후천적 학습과 교육의 능력에 따른 차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반세기 전 일제 식민 본토의 혁명적 선언은 식민지 조선에서ㅓ 여전히 유효했던 셈이다. 이광수의 페르소나인 형식이 미국 유학을 통해 민족을 위한 대안을 찾아내겠다는 『무정』의 결말은 그러므로 반세기 전 제기된 후쿠자와의 교육에 따른 차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조선 전통의 한문 학습에 근거한 세대 가운데 문화 자본이나 교육의 혜택을 받지 않은 계층에 댜한 기회균등 곧 평등의 문제를 제시한 독보적인 사례가 단재였다. 그리고 이 과정은 성균관 박사라는 문화 자본의 포기 그리고 식민지 국문 언론인의 포기라는 자기 기득권과 문화 자본의 철저한 희생을 자양분으로 삼아 이룩된 것이었다. 식민지 치하의 언론인을 포기한 것은 한편으로 최남선과 김성수 같은 이른바 민족 자본가의 영역까지도 일정하게 거부한 것이며, 이 선택은 단재에게 더 큰 고초를 안겨준 동시에 민족 내부의 평등이라는 선도적 가치를 발견한 계기가 되었다고도 하겠다.

  임시정부의 법통이라 한다면 민족이라는 대의를 위해 개인의 안위를 희생한 박은식과 김구 같은 인사들도 단재와 동일하다. 그러나 단재는 자기 희생을 통해 지금의 한국이 여전히 해결해야 할 민주와 기회균등이란 이념까지 제시했다는 점에서 더 높은 대표성을 가진다. 그리고 현재의 우리는 그가 포기했던 일제 귀족의 세계와 식민지 치하의 민족 자본가의 세계를 구분해가면서 헌법 전문을 되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p. 145-153.)

 

 

  * 임상석(「신채호의 영웅서사 역술과 대한제국기 언론매체의 국문 모색」, 『우리어문연구』60, 2018 ;「대한제국기, 일제 국가주의의 소설적 형상화」, 『국제어문』79, 2018 등)을 참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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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시학』2019-가을호 <한국 근대문학의 쟁점>에서

   * 임상석/ 부산대 점필재연구소 교수, 저서『식민지 한자권과 한국의 문자 교체』『한국 고전번역자료 편역집』(공역),『한국 고전번역시의 전개와 지평』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