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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고_『한국을 사랑한 세계작가들 ① 』/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

검지 정숙자 2019. 8. 9. 19:47

 

 

             언더우드가의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

 Lilias Horton Underwood,1851~1921 

 

      최종고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 견문록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1904)

 『호러스 언더우드와 함께한 조선 With Tommy Tomkins in Korea(1905)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인물이다. 장로교 선교사로 최초로 와서 평생을 살면서 새문안교회와 연세대학교를 세운 고맙고 훌륭한 사람이다. 그는 성서 번역에도 힘썼으며, 『한영사전』『영한사전』도 출간했다. 1900년에는 기독교청년회(YMCA)를 조직했고, 1915년 고아원에서 발전한 경신학교에 대학부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후일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의 전신)가 되었다.

  그런데 그의 아내인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Lilias Horton Underwood,1851~1921, 70세)가 남편과 함께 한국에 살면서 많은 글을 남겼다는 것에 대해 아는 사람이 적은 것 같다. 사실 필자는 언더우드가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바 있지만 릴리어스가 남긴 글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이 책을 쓰게 되면서 새삼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릴리어스 여사는 한국인과 함께 살면서 예리한 관찰력과 뛰어난 문장력으로 글을 썼고, 그것을 책으로 출간했다. 언더우드가는 어쩌면 그녀가 남긴 책 덕분에 한국과 더욱 깊은 인연을 이어갈 것이다.

 

 

  작가의 생애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Lilias Horton Underwood)는 1851년 6월 21일 뉴욕의 알바니(Albany)에서 태어났다. 시카고로 가서 지금의 노스웨스턴대학교의 일부인 여자의과대학(Women's Medical College)에 다녔다. 졸업 후 메어리 톰슨병원에 근무하면서 신앙생활에 충실하였다. 그러다 조선에 의료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1888년에 조선에 왔다. 그녀에게 조선은 낯설기만 한 나라였지만 과감히 여성 홀몸으로 조선에 온 것이다.

  서울에서 여의사로 활동하면서 명성황후의 시의侍醫가 되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 서양병원인 광혜원(廣惠院, 후일 제중원으로 이름이 바뀜)의 부인과 책임자로 일했다. 1889년 호러스 언어우드 목사와 결혼하여, 신혼여행과 선교 여행을 겸해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 등을 순회했다. 당시에 황해도와 평안도는 서양인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들 부부를 마냥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언더우드 부부는 밤마다 문종이를 뚫고 자신들을 엿보는 사람들 때문에 불편했지만 괴로움을 참으며 여행했다.

 신혼여행을 마친 릴리어스는 제중원濟衆院에 근무하면서, 남편이 세운 고아원에서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다. 여성들을 위한 성경반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릴리어스는 30여 년간 조선에 살면서 기독교 선교 활동을 비롯해 의료사업, 사회사업 등을 하다가 1921년 서울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한국명은 원호돈元好敦이다.

  언더우드가는 3대에 걸쳐 한국과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1890년에 릴리어스는 아들 호러스 호튼 언더우드(Horace Horton Underwood)를 낳았는데, 이 아들도 뉴욕대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약하였다.

  또 릴리어스의 증소녀인 엘리자베스 언더우드 교수는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그랜드밸리주립대를 거쳐 일리노이즈대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20세기 전환기의 한국 선교사 과제』『도전받는 선교사의 정체성』등의 책을 펴내기도 했다. 언더우드 교수는 원득한(Richard Fredrik Underwood) 씨의 딸로, 원 씨는 2004년 양화진에 묻힌 원일한 박사의 넷째 동생이다. 이렇게 언더우드가는 한국과 깊은 인연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작품 속으로

                  

 

  릴리어스 언어우드의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Life in Korea (상투쟁이들과 함께한 15년)』는 1904년에 출간되었다. 이 책은 일본과 러시아, 청나라 등이 조선을 차지하려고 팽팽하게 맞서던 시기에 쓰여졌는데, 릴리어스는 조선 구석구석을 다니며 동학운동과 갑오개혁, 청일전쟁, 을미사변,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을사늑약 등 역사의 현장을 꼼꼼히 기록했다. 2008년 김철 교수의 역으로 한국에서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견문록』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의 차례는 '1. 제물포와 서울의 인상, 2. 왕비께서 보내주신 혼인 선물, 3. 가마 타고 떠난 신혼여행, 4. 제리코로 가는 원숭이, 5. 압록강에서 바라본 조선과 중국, 6. 하나님이냐. 여호와냐, 상제냐?, 7. 잠들지 않는 조선의 복수심, 8. 솔내 마을의 외로운 순교자 맥켄지, 9. 어둠을 덮은 어둠, 10. 내 남편은 사랑방 손님을 몰랐다, 11. 상투가 상징하는 것, 12 황후 폐하의 마지막 호사, 13. 다시 흩어지는 '어린양'들, 14. 빌헬름 씨의 여덟 가지 죄상, 15. 조선의 죽음'으로 되어 있다.

  릴리어스는 명성황후의 주치의였는데, 이 책에서 명성황후가 처참하게 시해될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1895년 10월 8일 아침에 우리는 대궐에서 나는 총소리를 들었다. 그때는 평화로운 때였기 떄문에 그 소리가 틀림없이 불길한 징조임을 알 수 있었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다만 일본 군대가 새벽 세 시에 대원군을 호위하고 대궐에 도착하여, 다이 장군 휘하의 원주민 근위병을 물리치고 지금 대궐문을 지키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오후까지는 아무것도 더 알 수가 없었다. 오후에 한 조선 양반을 만나자 그는 기절할 듯이 놀란 얼굴로 지금 막 왕비가 살해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 뒤 몇 시간 동안에 좀 더 상세한 소식이 들려왔는데 이 소식은 확실한 것으로 굳어졌다. 그즈음에 대원군은 대궐에서 쫓겨나 시골집에 연금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손자 편을 들어 임금에게 반대하는 음모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

  러시아 사람인 사바틴 씨와 미국인인 다이 장군이 그때 일어난 일을 거의 모두 보았던 사람들인데 이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이 서로 맞아떨어지는 말을 하였다. 곧, 일본인 장교 휘하의 군대가 대궐 마당과 왕족의 처소를 에워쌌다는 것, 일본인 장교들이 대궐 마당에 저질러진 난폭한 짓을 눈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 그 모든 것을 일본인 '소시'(일본 메이지유신기에 자유인민 사상을 외치면서 폭력을 일삼던 무리)나 직업적인 칼잡이들이 저지른 것임을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는 점들이다. 서른 명쯤 되는 이 암살자들은 '왕비, "왕비! 어디 있어!" 하고 외치면서 왕족의 숙소에 들이닥쳤다. (…)

  일본인 하나가 임금의 어깨를 잡고 밀어제쳤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은 전하의 눈앞에서 일본인에게 죽임을 당했다. 세자 저하도 일본인에게 붙들렸다. 그들은 저하의 모자를 찢어발기고 머리채를 끌어당겼다. '소시'는 왕비가 어디 있는지를 대라고 하면서 칼로 저하를 위협했다. 마침내 그들은 가련한 왕비를 찾아내서는 칼로 찔러 죽였다. 그런 뒤에 왕비의 시체를 덮어 두었다가 궁녀들을 데려와서 갑자기 그것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공포에 질려 "중전마마! 중전마마!" 하고 소리쳤다. 이것으로 충분했다. 이런 계략으로 이 암살자들은 자기들이 찾던 사람을 제대로 쓰러뜨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에 곧 거기서 그다지 멀지 않은 작은 숲으로 시체들을 옮겼고 그 위에 등유를 부었다. 그리고 불을 붙였고 뼈 몇 줌만이 남았다. (185~189쪽) 

 

  릴리어스는 남편인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원두우元杜尤, 1859~1916, 57세)의 일대기를 쓰기도 했다. 이 일대기에는 1918년에 처음 출간되었는데, 2015년에 IVP출판사에서 이만열의 번역본인 『Underwood of Korea』를 출간했다. 이 책은 남편의 일대기를 통해 기독교가 어떻게 한국 사회에 접근하여 성장하고 있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그녀는 남편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언더우드의 전 생애 가운데 하나의 두드러진 특징, 즉 하나의 지배적인 성격이 바로 사랑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교파나 인종이나 시간이나 장소와 같은 좁은 테두리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 무한히 넘쳐흐르는 위대한 사람이었다. 수많은 심령들이 그에게 다가와 사랑의 마음으로 인격적인 헌신을 한 것도, 또 그가 전 생애에 걸쳐 '타오르는 횃불(a torch of fire)이라 불리면서 일관되게 살아가게 한 것도 그의 이러한 사랑이었다." 

  언더우드는 한국에 도착한 뒤 많은 시간을 한국어 공부에 할애했고, 다행히 왕실도 외국인들에게 호의적이었다.

  "우리는 한국어를 조금 알게 되자마자, 바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골목길이나 샛길로 나갔다.우리는 책을 한 권 꺼내 읽기 시작했다. 몇 명의 사람들이 주변에 모여들어 질문하면 우리는 그 책과 진리와 그 의미에 대한 설명을 시도했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는 먼저 우리 모두의 공통된 기반을 찾아, 점차 그들이 알고 있는 것에서 모르는 것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한 노력으로 조선에서 첫 번째 세례자인 노춘경이 탄생했다. 그는 알렌 박사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자신은 영어를 배우면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읽고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고 고백하며, 세례를 받게 된 것이다.

 

  언더우드는 선교 활동을 위해 1년간 의학 공부도 했는데, 광혜원廣惠院)에서 진료를 맡았고, 후일 이름을 바꾼 제중원濟衆 산하 의학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1886년 고아원(후일 경신학교)을 설립했다. 경신학교는 훗날 연세대학교가 되었다.

  한편, 릴리어스 호튼 언어우드는 『호러스 언더우드와 함께한 조선 With Tommy Tompkins in Korea(1905)도 출간했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2013년에 정희원의 번역본이 출간되었는데, 호러스 언어우드(Horace Underwood, 1890~1951, 61세)는 그녀의 아들이다.

  이 책의 차례는 '1. 소년의 탄생, 2. 소년이 본 것, 3. 폰 가메, 4. 조선 아이들의 생활, 5. 선물로 쓰는 글, 6. 브라운 아이즈, 7. 조선 유람, 8. 강가에서, 9. 비 오는 계절, 10. 꼬마 신랑들, 11. 일본과 중국으로, 12. 살림하기, 13. 소년들의 기독교 공려회'의 순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한국에서 살았던 언더우드 부부의 체험담을 사실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 언더우드 부부는 열악한 한국의 현실을 샅샅이 직시하고 있었으나 낙담하지 않았다. 한국을 위해 의료 사업과 교육사업 등의 일을 하면서 한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이어갔다. ▩ 

 

 

  * 블로그주: 이 책에는 당시의  다양한 사진과 세계 화가의 그림들도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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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고 지음『한국을 사랑한 세계작가들』에서/ 2019. 6. 28. <와이겔리> 펴냄

  * 최종고(崔鍾庫)1947년 경북 상주 출생, 서울법대 졸업, 독일 프라이부르크(Freiburg)대학에서 박사학위 받은 후 모교 서울법대에서 33년간 법사상사를 가르쳤다, 많은 학술서를 저술하여 2012년 삼일문화상 수상. 2013년 정년 후 시인, 수필가로 등단, 『괴테의 이름으로』등 시집과 문학서를 내었다. 현재 <한국인물전기학회>, <한국펄벅연구회>를 운영하고 <국제PEN한국본부>, <공간시낭독회>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