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장상용_라임라이트 · 31/ 호레이쇼

검지 정숙자 2019. 9. 1. 03:45

 

 

    호레이쇼

 

    장상용/ 문화콘텐츠학자

 

 

  16세기 말. 독일 위텐베르크(Wittenberg)대학교 학생 한 명이 모국인 덴마크 북동쪽 해안 엘시노어의 크론보르성에 소리 소문 없이 들어갑니다. 그는 덴마크 왕가의 중대한 사건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할 운명입니다.

  그의 모교인 위텐베르크대학은 '종교개혁의 아버지' 마틴 루터가 교수로 재직했던 유럽 최고의 학부였습니다. 마틴 루터는 1517년 10월 면죄부 판매에 항의하며 95개조 조항의 성명문을 위텐베르크 대학 부속 성당의 정문에 붙였습니다.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이곳은 유럽 프로테스턴트에게 성지였습니다. 덴마크 출신의 이 위텐베르크 대학생은 프로테스턴트 교육을 받은 이성적 학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누구일까요? 바로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1600-1601년 집필)에서 주인공 햄릿의 친구인 호레이쇼(Horatio)입니다. 세계 문학사상 가장 문제적인 성격의 인물로 꼽히는 햄릿과 그의 약혼녀 오필리어, 레어티즈, 폴로니어스, 클로디어스, 거트루드 등 주조연 여섯 명, 하나하나가 강한 개성을 뽐내고 전원 사망하는 이 작품에서 호레이쇼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인물일지도 모릅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이 비극의 진실을 목격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햄릿의 친구 정도로 호레이쇼를 기억하는 독자도 적지않을 듯합니다.

  사실 호레이쇼만큼 『햄릿』스토리의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인물도 없습니다. 주인공 햄릿조차도 유령을 먼저 목격한 호레이쇼의 호출에 의해 1막 2장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심지어 결말부인 5막 2장에서 햄릿의 죽음 이후 노르웨이 왕자 포틴브라스에게 권력을 이양하여 사건을 마무리하는 것도 호레이쇼의 몫입니다. 셰익스피어는 왜 호레이쇼에게 이렇게 막중한 역할을 맡긴 걸까요?

  지금부터 『햄릿』의 주인공을 호레이쇼로 놓고 보기로 하죠. 호레이쇼는 위텐베르크에서 동문수학한 친구 햄릿에게 알리지 않은 채 귀국해 한 가지 일에 착수합니다. 최근 급사한 선왕先王의 유령이 매일 밤 자정 엘시노어 성 성벽에 나타난다는 초병들의 보고를 확인하는 일입니다. 이 사건은 비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선왕은 햄릿 왕자의 부친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햄릿 왕자의 최측근으로서 자신의 눈으로 유령을 직접 확인한 후에야 햄릿에게 선왕 유령의 존재를 보고합니다. 햄릿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는 인물이자 이성적인 학자인 호레이쇼의 보고가 허황될 리 없습니다. 햄릿은 선왕의 유령과 만나 대화를 나누며 호레이쇼에게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전달합니다.

 

  "호레이쇼, 천지간에는 자네의 철학으로 상상하는 것보다 많은 것들이 있다네(There are more things in heaven and earth, Horatio, than are dreamt of in your philosophy.) " -『햄릿』1막 5장 

 

  이 말에서조차 햄릿은 호레이쇼의 '철학'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즉, 현상을 확인하고 검증하려는 호레이쇼의 자세와 학식은 인문학자로서 뛰어나지만 세상에는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작품 곳곳에서 호레이쇼의 판단력은 자로 잰 듯 정확합니다. 햄릿이 레어티즈와 검술 대결을 벌이기 직전, 호레이쇼는 이번 승부에 승산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또한 호레이쇼는 햄릿의 유지를 받들어 포틴브라스에게 권력을 이양합니다. 그러나 뜻밖에 행운을 잡고 우쭐해진 포틴브라스는 "이 왕국에 대해 권리(왕권)를 주장해야겠다."며 자신의 대권을 주장합니다. 호레이쇼는 이 비극적 살상극의 전말을 밝혀 인심의 동요를 막는 것이 급선무임을 포틴브라스에게 촉구합니다. 정곡을 찔린 포틴브라스는 호레이쇼의 요구에 따릅니다. 호레이쇼는 햄릿이 왕에 즉위했다면, 총리에 가장 적격인 인물로 보입니다.

 

     호레이쇼의 진정한 매력은

  그가 진실한 우정의 소유자라는 점

 

  그러나 호레이쇼의 진정한 매력은 그가 진실한 우정의 소유자라는 점입니다. 햄릿이 가장 어려울 때, 그의 곁에는 호레이쇼가 있습니다. 햄릿이 오필리어의 무덤 안으로 뛰어들어 레어티즈와 싸움을 벌이는 에피소드로 유명한 5막 1장에서도  햄릿을 동행한 유일한 인물은 호레이쇼였습니다. 햄릿은 레어티즈에게 미안해하는 속마음을 호레이쇼에게만 털어놓습니다.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파멸의 아가리에 몸을 던지는 햄릿을 보며 가장 안타까워한 인물 역시 호레이쇼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셰익스피어는 호레이쇼가 얼마나 안타까워했는지를 글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호레이쇼의 마음은 5막 2장에서 햄릿이 죽을 때, "저는 덴마크인이라기보다는 고대 로마인입니다(I am more an antique Roman than a Dane)."라며 독주를 마시고 친구와 동행하려던 행동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햄릿 사건과 관련해 각각의 성격적 혹은 병적 결함 때문에 파멸하는 주요 등장인물 여섯 명과 분명히 대비됩니다.

  이성과 감성이 균형을 이룬 "호레이쇼는 『햄릿』에서 유일하게 건강한 인물입니다. 어느 지인이 "호레이쇼는 작가 셰익스피어가 미래의 주인공으로 설정한 인물"이라고 말했는데, 저 또한 이에 전적으로 공갑합니다.

  호레이쇼, 세상의 혼탁함 속에서 오늘도 우리는 당신이 몹시 그립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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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엠포엠』2019-가을호 <장상용의 라임라이트 31>에서

  * 장상용/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 외국어대 대학원 러시아 문학 전공, 일간스포츠 만화와 문화 전문기자, EBS 스토리 코치,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스토리텔링 온라인 강사, SICAF(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피스티벌) 큐레이터 등을 지냈다.『전방위 문화기획자를 위한 스토리텔링 쓰기』『프로들의 상상력 노트』『내가 펜이고 펜이 곧 나다』『CEO, 만화에서 경영을 배우다』『사랑책』등의 책을 썼다. 현재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부천국제만화축제(BICOF)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