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들의 부친상
이명지/ 수필가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들었다는데, 아버지는 의무를 가르치는 데 쓰라고 만든 것은 아닐까 잠시 생각해본다. 내 아이들이 부친상을 치르고 있다. 드문드문 조객이 이어지고 있다.
부부라는 인연을 끝낸 지 10여 년, 그는 아이들과도 왕래 없이 살다가 1년여 전 폐암 말기 환자가 되어 연락이 왔다. 아이들에게 아빠의 존재는 죽음을 목전에 두었어도 용서되지 않는 분노의 대상이었다. 꽁꽁 얼어붙은 마음을 열지 못하겠다는 아이들을 설득하고 다독이는 일이 내 몫으로 던져졌다. 분노, 좌절, 원망이라는 단어는 그와 인연 맺은 후부터 온 삶으로 끌어안아 허덕인 세월의 총칭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내 마음엔 나약한 한 인간에 대한 연민, 그 하나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미움도 애틋한 마음이 담긴 애증의 증표라면 지금 이 마음이 꼭 맞지 싶었다.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에도 말간 이 심경은 증오조차도 일 푼어치도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아이들에게는 분노가 생생히 남아 있었다. 그게 애증이라고 생각하니 한편 안심이 되기도 했다. 자식의 의무와 증오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아이들을 달래고 설득했다. 아무리 부정해도 천륜을 어기지 못한다는 통념이 아니라 앞날 창창한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회한을 남기지 않기를 바랐다. 훗날 너희가 부모가 되었을 때 그때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될 여지를 남기지 말 것, 자식의 도리를 다했다는 당당함은 너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부모답지 않은 부모는 부모가 아니다. 하지만 내 아이들이 자식다운 자식으로 당당할 수 있기를 나는 바랐다.
3개월 시한부이던 시간이 1년여가 될 동안 아이들이 그의 보호자가 되었다. 완강하던 마음도 많이 누그러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남매가 상의하여 병원비를 충당하는 눈치였으나 지켜볼 뿐 돕지 않았다. 자식의 몫과 나의 몫은 엄연히 다르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위독하다는 소식이 온 날은 휴일이었다. 간병인이 없어 난감해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내가 간병하겠다고 나섰다. 아이들이 깜짝 놀라며 괜찮다고 했다.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 아이들 생각도 했지만, 마지막 길을 내가 배웅해주고 싶었다. 그것이 아이 아빠에 대한 마지막 예의이고 싶었다.
앙상하게 한 줌이 된 몸으로 가쁜 숨을 호흡기에 의지한 채였지만 의식은 또렷한 모습이었다. 그는 나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사실 1년 전 폐암 말기 선고를 받았다고 했을 때 그의 병실을 찾아갔었다. 10년 만이었다. 그때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한참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름을 보고 병실에 찾아간 나도 그의 수척한 모습에서 옛 얼굴을 기억해내는 데 시간이 걸렸고, 내가 올 것이란 것을 추호도 예상치 못했던 그도 나를 인지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거기에 가겠다고 결심하기까지 쉽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나를 거기까지 가게 한 것은 무슨 조화였을까. 때마침 치과 정기치료가 예약되어 있던 병원이었다. 기실 나는 머릿속이 몹시 혼란스러웠다. 거기까지 가서 문병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서, 치과 진료를 마치고 내려올 때까지도 아무런 결정을 하지 못했는데 내 발이 병실을 향해 가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렇게 1년 후 마지막 시간을 이틀 남긴 채 다시 조우한 것이다. 흐려가는 의식 속에서도 그는 나를 단번에 알아보고 사력을 다해 손을 들었다. 그리고 가쁜 숨 사이로 "건강하라"고 말했는데 나는 "미안하다"라는 소리로 고쳐 들었다. 그동안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용서하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나한테는 왜 용서의 부채를 갚지 않나 투덜대던 참이었으니까. 마지막 밤을 병실에서 아이들과 모두 함께 지내고 다음날 그는 고요하게 갔다. 마지막 이틀 동안 나는 그의 아내도 채권자도 아닌, 그저 한 인간의 마지막 길을 평화롭게 갈 수 있도록 돕는 간병인으로 곁에 있어 주었다.
내 아이들의 부친상을 치르는 동안 나는 참으로 감사하고 평화로운 마음이었다. 아이들이 자식의 도리를 기꺼이 해준 데 대해, 그의 가는 길을 외롭지 않게 지켜줄 수 있었던 데 대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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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지 산문집『헤이, 하고 네가 나를 부를 때』 2019. 3. 8. <열린출판> 펴냄
* 이명지/ 1993년『창작수필』로 등단, 수필집『중년으로 살아내기』, 논문집『전혜린 수필연구』, 동국문학상 & 동인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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