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두 가지의 자기 포기/ 임승빈

검지 정숙자 2019. 7. 12. 18:07

 

<『딩아돌하』를 내면서>

 

 

    두 가지의 자기 포기

 

    임승빈/ 본지 주간

 

 

  전에 A. 모로아의 『예술의 이해』라는 책을 읽다가 '제1행은 은총, 2행 이하는 탐구'라는  P. 발레리의 말을 접한 적이 있다. 시의 1행, 즉 발상은 내가 애써 생각해 내는 것이 아니라 신에 의해서 은총처럼 주어지는 것이고, 그 1행에 대한 인간적 탐구를 통해 비로소 시적 창조는 완성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발레리의 말은 유신론에 바탕을 둔 것으로 시적 창조의 원인을 신에게 두는 입장이다. 인간적 탐구를 전제로 하고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은총을 내리는 신의 존재가 없다면, 그 어떤 창조도 가능할 수 없다는 얘기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P. 발레리의 은총과 탐구는 심리학으로 말하면, 무의식과 의식의 작용이라 할 수도 있다.

  부루스터 기셀린은 『예술창조의 과정』에서 예술창조 과정에서의 의식과 무의식의 기능을 말하고 있다.

  의식은 질서를 지향하는 보수적 성향 때문에 그 질서에 반하는 새로운 창조적 발상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의식은 그 의지를 통해 무의식에서 느닷없이 떠오른 새로운 발상이 달아나지 않도록 붙잡는 일, 창조를 위한 다양한 지식의 습득, 필요한 기술에 대한 훈련 등 창조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모색하는 기능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무의식은 혼돈이고 무질서이기 때문에 그 어떤 엉뚱한 결합도 가능해서 진정 새로운 창조의 보고이긴 하지만, 순간적이고 무의지적이기 때문에 그 엉뚱한 결합의 결과인 창조의 씨앗이 의식의 의지적 작용 없이는 의식할 수도, 구체적인 창조로 이어질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발상, 즉 무의식에서 떠오른 창조의 씨앗을 의식이 붙잡기 위해서는 의식과 무의식이 공존하는 상태가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의식의 지배를 받는 자기 포기가 가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술창조의 발상 단계에서는 의식의 지배를 받는 자기에 대한 포기가 강력히 요구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창조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자기 포기는 또 있는데, 이것은 우선 예술창조의 개념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전제한다.

  예술창조는 물론, 모든 창조는 기존의 질서에 대한 세련화가 아니라, 이제까지는 없던, 전혀 낯선 존재(의미, 느낌, 구체적 실체)를 이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새로운 창조로 해서 기존 질서는 필연적으로 무너지거나 재편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창조자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존의 질서에 속해 있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포기하는 구체적 행위이다.

  우리의 일상은 거의 대부분 의식의 영역 속에서 이루어진다. 일상의 질서와 가치 체계가 대부분의 우리 삶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런 일상의 영위를 위해서는 기존의 질서와 가치 체계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수용할 수밖에 없다. 아니, 우리 스스로도 나름의 어떤 질서나 제도, 가치나 신념 체계를 확립하고, 고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런 질서, 제도, 가치나 신념 체계는 나의 사유를 고착화, 통념화, 관습화한다. 그리고 나 자신의 창조의식을 무력화한다. 때문에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는, 기존의 질서, 제도, 가치나 신념 체계에 대한 자신의 확신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공존 상태를 통해 무의식에서 솟아오르는 창조의 씨앗을 붙잡기 위해 의식의 지배를 받는 자기에 대한 포기와는 같으면서도 또 일면 다르다. 의식의 일상 속에서 의지적으로  자기 확신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또 자기 확신에 대한 포기는 철학적 행위와 유사하다. 왜냐하면 철학은 이미 알고 있거나 확신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반성적 성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자기 확신에의 포기는 다시 겸손을 전제해야 한다. 왜냐하면 겸손은 단순한 자기 비하가 아니라, 자기 확신에 대한 회의를 전제로 상대를 존중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자기 포기와 겸손으로 해서 우리 시는 다시 언제나 새로운 지평을 눈매할 수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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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딩아돌하』 2019-여름호 <『딩아돌하』를 내면서』>전문

  * 임승빈/ 본지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