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파사의 혼례
알베르 카뮈(1913-1960, 47세)
봄이 되면 티파사에는 신들이 내려와 산다. 태양 속에서, 압생트 잎 향기 속에서, 은빛으로 철갑을 두른 바다에서, 야생野生의 푸른 하늘, 꽃으로 뒤덮인 폐허, 돌무더기 속에 커다란 거품을 일으키며 끓는 빛 속에서 신들은 말한다.
어떤 시간에는 들판이 태양빛 때문에 캄캄해진다. 두 눈으로 그 무엇인가를 보려고 애를 쓰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속눈썹 가에 매달려 떨리는 빛과 색채의 작은 덩어리들뿐이다.
엄청난 열기 속에서 향초香草의 육감적인 냄새가 목을 긁고 숨 막히게 한다. 풍경 깊숙이, 마을 주변의 언덕들에 뿌리를 내린 쉬누아의 시커먼 덩치가 보일 듯하더니 이윽고 확연하고 둔중한 속도로 털고 일어나서 바다 속으로 가서 웅크려 엎드린다.
벌써 바닷가로 가슴을 열고 있는 마을을 지나 우리는 도착한다. 노랗고 푸른 세계로 들어가면 알제리 여름의 대지가 향기 자욱하고 톡 쏘는 듯한 입김으로 우리를 맞이한 도처에 부겡비에 로자꽃이 빌라villa들의 담 너머로 피어오른다. 뜰 안에는 아직 희미한 붉은빛의 부용화가 꽃잎을 열고 크림처럼 두툼한 차茶빛 장미와 길고 푸른 붓꽃의 섬세한 빛이 질펀하게 넘쳐난다. 돌은 모두 뜨겁게 탄다. 우리가 미나리아재비꽃빛 버스에서 내릴 무렵 푸줏간 고기장수들은 빨간 자동차를 타고 아침 행장을 풀고 그들의 요란한 나팔을 불며 마을 사람들을 부른다.
항구 왼쪽에는 마른 돌계단만이 유향나무와 금작화 사이의 폐허로 뻗어 있다. 길은 조그마한 등대 앞을 지나 들의 한복판으로 빠져들어 간다. 벌써부터 그 등대 밑에서는 보라 · 노랑 · 빨강 꽃들 자욱한 살진 식물들이, 요란한 입맞춤 소리를 내면서 바다가 핥아 대는 첫째 바위들 쪽으로 뻗으면서 자란다. 부드러운 바람 속, 얼굴의 한쪽 뺨만을 덥혀 주는 바다를, 그 바다의 빛나는 치열齒列이 짓는 미소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폐허의 왕국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관객이 되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다.
몇 걸음을 옮기면 압생트 잎들이 목구멍을 할퀸다. 그것들의 회색빛 솜털이 끝 간 데 없이 폐허를 뒤집고 있다. 압생트 잎의 정수가 열기 속에서 발효하고 땅에서부터 태양에까지 하늘도 취하여 비틀거리게 할 알코올이 이 세상 온 누리에 걸쳐 피어오른다.
우리는 사랑과 욕망을 만나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 우리는 교훈을 찾는 것도 아니요, 위대해지는 데 필요하다는 그 어떤 쓰디쓴 철학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태양과의 입맞춤과 야생 향기 저 너머에는 모든 것이 헛된 것으로 여겨진다. 나는 굳이 이곳에 혼자 있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나는 이곳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오는 일이 잦다. 나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사랑의 얼굴이 지어 보이는 맑은 미소를 읽어 보곤 했다. 여기에 오면 나는 질서나 절도 따위는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해 버린다. 나를 온통 휩싸는 것은 자연과 바다의 저 위대한 무분별의 사랑이다. 폐허와 봄의 결혼 속에서 폐허는 다시금 돌이 되고 인간의 손길로 인해 윤이 나 있던 모습을 이제는 다 버리고 자연 속으로 되돌아와 있다. 탕녀蕩女 인 딸들의 귀환을 위하여 대자연은 꽃들을 아낌없이 피워 놓는다. 고대광장古代廣場의 판석板石들 사이로 헬리오트로프(연보라 꽃이 피는 향기 짙은 정원 식물)는 붉고 흰 머리를 쳐들어 올리고, 붉은 제라늄 꽃들은 옛적엔 가옥이요, 사원이요, 광장이던 자리에 그들의 붉은 피를 쏟아붓는다. 많은 지식으로 인하여 어떤 이들은 신神에 이르게 되듯이 기나긴 세월은 폐허를 어머니 집으로 다시 데려왔다. 오늘에야 마침내 그들의 과거는 폐허를 떠나 버렸으니 무너지게 마련인 사물의 중심으로 폐허를 다시 인도해 주는 심원한 힘에 복종하는 것 이외에 다른 마음 쓸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압생트 잎들을 뭉개어 비비며, 폐허를 껴안고 애무하며, 나의 숨결을 세계의 저 소용돌이 치는 입김과 맞추어 보려고 애쓰며 보낸 시간이 얼마인가? 야생 향기와 졸음을 몰고 오는 풀벌레들의 연주 속에 파묻혀서 나는 열기로 숨 막힐 듯한 저 하늘의 지탱하기 어려운 위대함에 두 눈과 가슴을 활짝 연다. 진정한 자기가 되는 것, 자신의 심오한 척도尺度를 찾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쉬누아 언덕의 저 단단한 등골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나의 가슴은 어떤 이상한 확신으로 차분히 가라앉는 것이었다. 나는 숨 쉬는 방법을 배우고 스스로를 통일시키며 자신을 완성해 내고 있었다. 저 사원의 부서지고 남은 원주들이 태양의 운행을 가늠해 주고, 그곳에서는 마을이 온통 그 희고 핑크빛 나는 벽돌과 초록빛 베란다들과 함께 굽어보이므로 내가 언덕을 하나씩 하나씩 걸어 오를 때마다 새로운 보상이 나를 위해 마련되는 것이었다. 동쪽 언덕 위에 있는 대성당 역시 그러하였다. 성당에는 이제 오직 벽들만 남아 있을 뿐, 그 성당 주위에는 커다란 원을 그리면서 땅속에서 파내 놓은 장식된 석관石棺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그것들의 대부분은 간신히 밖으로 파내져 있는 것이어서 여전히 한 모퉁이는 땅속에 묻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샐비어와 향꽃무가 그곳에서 자란다. 생트-살자 대성당은 기독교 사원이었다. 그러나 지금 빈틈으로 들여다보면 우리에게 전해 오는 것은 소나무와 사이프러스가 무성한 언덕들 혹은, 그 하얀 강아지들을 뒹굴게 하고 있는 바다 이 세상의 음악뿐이다. 생트-살자를 떠받치고 있는 언덕은 그 정상이 평평해서 옛 사원의 돌기둥 사이로 바람은 더 넓게 분다. 아침 햇빛 아래 위대한 행복이 공간 속에서 균형을 잡는다.
굳이 신화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가여운 사람들이다. 여기는 신들의 잠자리가 되고 하루의 흐름 속에서 그 눈금 노릇을 한다. "여기에 붉은 것이, 푸른 것이, 초록빛 나는 것이 있구나. 이것은 바다 · 산 · 꽃들이구나."라고 나는 쓰고 읽는다. 코밑에다 유향나무 열매들을 으스러뜨려 문지르는 것이 이토록 좋음을 말하기 위해 구태여 디오니소스에 대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땅 위에 살며 이 사물들을 본 사람은 행복하여라"라는 해묵은 찬가를 노래한 것은 데메테르 신이었던가? 그런 신 따위는 나중에 자유롭게 생각하리라. 본다는 것, 이 땅 위에서 본다는 것, 이 교훈을 어찌 잊겠는가? 알뤼시스의 신비에 있어서도 오직 바라보는 것으로 흡족한 것이었다. 여기서조차도 나는 이 세계에 대해 흡족할 만큼 다가서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전라全裸의 몸이 되어 아직 대지의 정수로 향기가 몸에 배어 있는 몸을 바닷물에 던져 땅의 정기를 바다에 씻어야 한다. 그리고 그토록 오래전부터 땅과 바다가 입술과 입술을 마주하고 열망하던 그 포옹을 나의 피부 위에서 맺어 주어야 한다. 물속에 들어오면 돌연한 전율, 차디차고 캄캄한 끈끈이의 용솟음, 그리고 귀가 먹먹해지는 속으로 빠져든다. 콧물이 흐르고 입안은 쓰디쓰다 수영을 하면 바닷물 밖으로 물이 번질거리는 두 팔이 솟아나와 햇빛 속에 금빛으로 물들고 전생의 근육이 뒤틀리며 다시 수면을 친다. 나의 몸 위에 물이 재빨리 미끄러지며 내 두 다리는 물결을 수선스럽게 소유한다 그리고 문득 아득해진다. 기슭에 나오면 모래 위에 처박히듯 쓰러져 세계에 몸을 맡기고 살과 뼈의 무거움 속으로 되돌아 나온다. 햇빛으로 어리둥절한 채 가뭇가뭇 내 두 팔에 눈을 던지면 물이 미끄러지면서 드러나는 마른 피부의 반점 위에 금빛의 잔털과 소금가루.
여기서 나는 사람들이 소위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그것은 무한히 사랑할 권리를 말한다. 이 세상에는 단 하나의 사랑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여인의 몸을 껴안는 것, 그것은 하늘에서 바다로 내려오는 신비한 기쁨을 가슴에 껴안는 일이다. 잠시 후 내 몸속에 그 향기가 스며들게 하기 위하여 내가 압생트 잎들 위에 몸을 던지게 되면 나는 모든 선입견을 물리치고 하나의 진실을 성취한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리라. 그 진실은 태양의 전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나의 죽음의 진실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지금 도박하고 있는 것은 분명 나 스스로의 삶이다. 뜨거운 돌의 맛이 나는 삶, 바다의 숨결과, 이제 막 노래하기 시작하는 매미소리로 가득한 삶, 미풍은 서늘하고 하늘은 푸르다. 나는 마음껏 이 삶을 사랑하며 그것을 자유롭게 말하고 싶다. 삶은 내게 인간 조건에 대한 긍지를 준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흔히들 이야기하듯이 뽐낼 필요는 없다. 만약 뽐낼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 태양, 이 바다, 젊음으로 고동치는 이 가슴, 소금냄새 나는 나의 몸, 그리고 애정과 영광이 황색과 청색으로 융합되는 이 무한대한 풍경이다. 바로 이것을 정복하기 위하여 나의 힘과 능력을 모두 바쳐야 한다. 여기서는 그 무엇도 내 본연의 모습을 일그러뜨리지 않는다. 그네들의 모든 처세술 따위에 못지않은 저 어려운 삶의 지혜를 참을성 있게 배우면 족하다.
정오가 좀 못 되어 우리는 폐허를 지나 바닷가에 있는 조그마한 카페로 돌아온다. 태양의 심벌즈와 색채로 울리는 머리에는 그늘이 가득 찬 홀과 얼음같이 차가운 초록빛 박하주 한 잔의 환영이란 얼마나 신기한가! 밖에는 바다, 그리고 먼지로 불타는 듯 뜨거운 길. 식탁에 앉아서 깜박거리는 속눈썹 사이로 뜨거움으로 백열白熱하는 하늘의 갖가지 눈부신 빛을 붙잡아 보려 애쓴다. 땀에 젖은 얼굴, 그러나 입고 있는 얇은 옷에 감싸여 서늘한 몸으로 우리들은 이 세계와의 결혼 하룻날의 나른한 행복을 한껏 펼친다.
이 카페에는 먹을 것이 신통치 않다. 그러나 과일은 많다. 특히, 이로 깨물어 턱에 과즙이 흐르도록 하여 먹는 복숭아가 많다. 과육에 이를 깊숙이 박고 나는 내 피가 쿵쿵 울리면서 귀에까지 올라와 전해지는 소리를 듣는다. 나는 두 눈을 활짝 열고 본다. 바다 위에는 정오의 엄청난 침묵, 아름다운 존재들은 저마다 제 아름다움에 대한 타고난 긍지를 지니고 있다. 세계는 오늘 사방으로 저의 긍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런 세계 안에서 무엇 때문에 내가 삶의 기쁨을 부정하겠는가? 그렇다고 삶의 기쁨만으로 모든 것을 다 축소해 버릴 것도 아닌 바에는, 행복해진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바보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즐거움을 두려워하는 자를 나는 바보라고 부른다. 자만심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귀가 아프도록 얘기 들은 바 있다. "알고 있지요. 그것은 사탄의 죄악이랍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조심해야 돼요. 그러다가는 탈선하게 되고 정력을 낭비하게 된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그 후 과연 나도 배웠다. 어떤 종류의 자만심을……. 그러나 또 다른 어느 때는 이 세계가 온통 내게 주겠다고 모의를 해 대는 삶의 긍지를 소리쳐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 티파사에서는 "나는 본다"라는 말은 "나는 믿는다"라는 말과 같은 값의 뜻을 지닌다. 그리하여 나는 내 손이 만질 수 있고 내 입술이 애무할 수 있는 것을 부정하려고 고집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으로 무슨 예술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은 욕구가 아니라 다만 그것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을 느낀다. 그 두 가지는 서로 다른 일이다. 나에게 티파사는 이 세계에 대한 어떤 관점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묘사하는 그런 극적 인물들같이 보인다. 그 인물들처럼 티파사는 증언한다. 그것도 씩씩하게. 티파사는 오늘 나의 인물이다. 그 인물을 쓰다듬고 묘사하노라면 나의 도취감은 끝이 없을 것만 같이 여겨진다. 사는 시간이 따로 있고 삶을 증언하는 시간이 따로 있는 법이다. 그리고 창조하는 시간도 따로 있다. 그것은 좀 덜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나는 오직 내 몸을 전제로 살고 내 마음 전제로 증언하면 된다. 티파사를 살고 그것의 가르침을 나타낼 일이다. 예술 작품은 그 뒤에 올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유라는 것이다.
내가 하루 낮 이상 티파사에 머무는 법은 절대로 없었다. 어떤 것을 흡족하게 보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듯이 어떤 풍경을 너무 보아서 질려 버리는 때도 언제나 오게 마련이다. 충분히 보지 않고 너무 뚫어지게 들여다본 탓으로 마침내 그것의 삭막한 면이나 찬란한 구석을 발견하게 되는 얼굴들이나 마찬가지로, 산山 들이나 하늘, 바다도 어떤 새로운 기운을 입어 변모를 겪을 필요가 있다. 단지 한동안 잊어버리고 있다가 다시 보기만 해도 세계가 새롭게 보이는 것을 신기하다고 감탄해야 할 터인데 사람들은 너무 빨리 싫증이 난다고 불평을 한다.
저녁 무렵이면 나는 국도國道 연변에 보다 더 정돈된 모습으로 꾸민 공원 한쪽으로 되돌아 나오곤 했었다. 향기와 태양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와 이제는 저녁 기운으로 서늘해진 대기大氣 속에서 정신은 차분히 가라앉고 긴장이 풀린 몸은 만족을 맛본 사랑에서 오는 내적內的 침묵을 음미하고 있었다. 나는 벤치에 앉아 전원 풍경이 빛으로 확대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흡족하였다. 내 머리 위로 한 그루의 석류나무가 봄의 모든 희망을 송두리째 꼭 오므려 쥔 주먹처럼 홈이 파진 껍질을 닫고 있는 꽃봉오리들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내 뒤에는 로즈마리가 피었었다. 나는 오직 그것들의 알코올 같은 향기만을 느낄 수 있을 구릉을 나무들이 사진들처럼 가를 두르고 있었고, 더 멀리는 바다 기슭, 그 위로 하늘이 마치 고장 난 돛배처럼 거의 모든 따뜻함을 드리우고 있었다. 내 마음속에는 야릇한 기쁨이, 고요한 의식에서 생기는 바로 그 야릇한 기쁨이 일고 있었다. 배우들이 자기의 역役을 잘해 냈다고 의식할 때, 더 정확하게 말해서 자기의 몸짓과, 자기가 그 역을 맡은 이상적인 인물의 몸짓을 잘 일치시키고, 사진에 만들어 놓은 그림 속으로 문득 뛰어 들어가서 바로 자신의 심정으로 생명을 불어넣어 생동하게 만들었다는 의식을 가질 때 그들이 느끼는 특수한 감정이었다. 그때 내가 느꼈던 것은 바로 그 감정, 내가 나의 역을 잘해 냈다는 그 느낌이었다. 그때 내가 느꼈던 것은 바로 그 감정, 내가 종일토록 기쁨을 누렸다는 사실이 유별난 성공으로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경우에는 행복해진다는 것만을 하나의 의무로 삼은 인간 조건의 감동적인 완수라고 여겨지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때야 우리들은 어떤 고독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되찾은 고독은 만족감을 동반한다.
이제 나무들마다 새들이 가득히 깃들었다. 대지는 어둠 속으로 잠겨들기 전에 천천히 숨을 내쉰다. 잠시 후 첫 번째 별이 뜨면 밤은 이 세상의 무대 위로 내릴 것이다. 대낮의 찬란하던 제신諸神은 날마다의 그들 죽음으로 돌아가리라. 그러나 또 다른 신들이 찾아올 것이다. 더 많은 어둠을 위하여 그네들 황폐한 얼굴들이 그 사이에 대지의 심장 속에서 태어날 것이다.
적어도 지금은 모래 위에 끊임없이 와서 부서지는 파도가 황금빛 꽃가루들이 넘실대는 저 공간을 거슬러 나에게까지 밀려오고 있었다. 바다 · 들판 · 침묵, 이 땅의 향기, 이 모든 향기로운 생명으로 내 전신이 가득 차고, 나는 이 세계의 벌써 금빛으로 익은 과일을 깨물며, 그 알큰하고 강렬한 과즙이 내 입술을 따라 흘러내리는 것을 미칠 듯한 감동으로 느끼고 있었다.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도, 이 세계도 아니다. 다만 세계로부터 나에게로 사랑이 태어나 이어지게 하는 저 화합과 침묵이 중요할 따름이다. 나는 사랑을 오직 나만을 위하여 요구할 만큼 바보스럽지는 않다.
태양과 바다로부터 태어나서 그것의 단순성으로부터 위대함을 찾아낼 줄 아는 저 활기 넘치는 한 종족種族, 바닷가에 가서 그네들 하늘의 눈부신 미소와 함께하는 미소를 던져 보내고 있는 그 종족 전체와 사랑을 나누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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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바다』 2018-가을호 <해외수필 읽기 20>에서
* 이태동/ 문학평론가, 서강대명예교수, 평론집 『나목의 꿈』『한국 현대시의 실체』등, 수필집『살아 있는 날의 축복』『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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