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이찬_『계간 파란』 2018년 가을호 권두 에세이(발췌)/ 하…… 그림자가 없다 : 김수영

검지 정숙자 2018. 11. 12. 20:58

 

   

<권두 에세이>

 

계간 파란 2018년 가을호       이미지

 

 

    하…… 그림자가 없다

 

     김수영

 

 

  벌써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

  우리들의 적은 커크 더글러스나 리처드 위드마크 모양으로 사나웁지도 않다

  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악한이 아니다

  그들은 선량하기까지도 하다

  그들은 민주주의자를 가장하고

  자기들이 양민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선량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회사원이라고도 하고

  전차를 타고 자동차를 타고

  요릿집엘 들어가고

  술을 마시고 웃고 잡담하고 

  동정하고 진지한 얼굴을 하고

  바쁘다고 서두르면서 일도 하고

  원고도 쓰고 치부도 하고

  시골에도 있고 해변가에도 있고

  서울에도 있고 산보도 하고

  영화관에도 가고

  애교도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곁에 있다

 

  우리들의 전선戰線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다지도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

  우리들의 전선은 된케르크도 노르망디도 연희고지도 아니다

  우리들의 전선은 지도책 속에는 없다

  그것은 우리들의 집안 안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직장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동리인 경우도 있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의 모습은 초토전이나

  「건 힐의 혈투」모양으로 활발하지도 않고 보기 좋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언제나 싸우고 있다

  아침에도 낮에도 밤에도 밥을 먹을 때에도

  거리를 걸을 때도 환담을 할 때도

  장사를 할 때도 토목공사를 할 때도

  여행을 할 때도 울 때도 웃을 때도

  풋나물을 먹을 때도

  시장에 가서 비린 생선 냄새를 맡을 때도

  배가 부를 때도 목이 마를 때도

  연애를 할 때도 졸음이 울 때도 꿈속에서도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수업을 할 때도 퇴근 시에도

  사이렌 소리에 시계를 맞출 때도 구두를 닦을 때도……

  우리들의 싸움은 쉬지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 있다

  민주주의 싸움이니까 싸우는 방법도  민주주의식으로 싸워야 한다

  하늘에 그림자가 없듯이 민주주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

  하…… 그림자가 없다.

 

  하…… 그렇다 

  하…… 그렇지……

  아암 그렇구 말구…… 그렇지 그래……

  응응………… 뭐?

  아 그래…… 그래 그래.

    -전문-  

 

 

  1960년 4월 3일: "그림자", 혁명적 정동과 군중적 감염력(발췌)_ 이찬  

  올해 다시 개정되어 출간된 『김수영 전집』(민음사, 2018)에 따르면, 「하…… 그림자가 없다」는 '4.19 혁명'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 1960년 4월 3일 쓴 작품이다. 표제어에서 어렴풋이 직감할 수 있듯, 이 시편은 "그림자"라는 가상의 이미지를 예술적 짜임 관계의 중핵으로 삼으면서, "민주주의"로 표상되는 당대 사회정치적 감성의 흐름과 배치, 즉 혁명적 정동의 발생과 군중적 감염력의 확산을 예감하고 있는 첨단의 문제 설정을 휘감고 있다.[이찬, 「김수영 시와 산문에 나타난 시뮬라크르의 정치학」, 『한민족문화연구』40집, 2012.](p.5.) 

 

  '사건적 개별성에 대한 들뢰즈의 새로운 용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저 원리로 기능하는 것 역시 '되기'이다. 그는 자신의 대표작 『천의 고원』에서 '되기'로 표상되는 생성과 창조와 변이의 힘을 뿌리줄기인 '리좀(rhizome)'에 빗대어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리좀의 수평적인 생성과 결합의 원리를 통해 세계를 확고부동한 이념적 규준이나 선험적 도식에 따라 구획하고 고정시키려는 수목형의 체계에 구멍을 뚫어 버리려 했던 셈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모두에게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창조의 선, 탈주선(ligne de fuite)을 그려 낼 수 있는 지도 제작자(cartographe)가 되기를 제안하고 독려하고자 한다.(p.14.)  

 

  이들은 결국 시 이미지를 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해명하고 논의하기 위해서는 언어-수사학적인 차원을 넘어서, 그것이 발생하고 전파되고 유통되는 과정 전반에 대한 사유가 필수 불가결하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철학을 위시한 미디어학과 커뮤니케이션의 논의들, 그리고 최첨단의 과학 기술을 응용한 새로운 예술 장르들들 동시에 탐구하고 이들의 관계망을 함께 살피는 인문-사회-과학 전반을 넘나드는 학제적 연구가 필수적으로 요청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p.15.) / 계간 파란 편집 위원 이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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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파란』2018-가을호 <권두 essay>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