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명학의 꽃불을 당기다
황구하
천지사방 다시 봄입니다. 섬진강가 홍매화 환히 피워놓고 올라온 바람은 산수유, 개나리 코끝 살살 간질여 여기서도 에취! 저기서도 에취! 꽃 기침 연방 터지게 하더니 기어코 과수원 나무들 아래 낮게 엎드린 꽃다지, 광대나물, 봄맞이꽃 고 작은 풀꽃들까지 화르르 피어나게 합니다.
그렇게 봄바람에 실려 온 당신 전화를 받았습니다. 사람 발길 많지 않은 첩첩산중에 성냥개비처럼 꽃눈 달고 있는 진달래 한 그루 모셔왔다고요. 덩치 큰 나무 그늘 비탈, 아슬아슬하기만 하던 진달래 꽃나무 거처를 뜰로 옮기고 나니 온 잡안이 다 환하게 빛이 난다고 하셨지요.
발길 드문 옥연사玉淵祠 뜨락
고서들 바람을 쐬고 계신다
거처를 옮기기 위해
숯막 같은 궤에서 나오셨는데
근엄하게 필사된 옷고름 풀어 젖혀
전족을 한 채 잠든 양명도
두 손 묶인 휴정의 목탁 소리도
햇귀에 부풀어 오르는 사이
맹자도 두보도 어깰 맞대고
주춧돌 아래 나란히 앉으신다
잇바디 드러내며
꽃잎처럼 몸을 펴는 작은 시첩들
바람은 무슨 힘인가
고요한 숨 저렇게 펄럭이게 하고
이윽히 세상 저편 봄볕을 끌어당긴다
사람 인人자 맞배지붕
대숲 그늘 걷어내며
옥연사, 환하게 핀다
-황구하, 「잠시 환하다」전문-
옥연사는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 선생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묘재실이지요. 이곳 유장각에 보관되어오던 소재 선생 유품들은 지난봄, 종가의 기탁으로 상주박물관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빗장 걸린 궤에 갇혀 숨 막혔을 고서들을 비롯해 목판 등 많은 유품이 시원하게 바람을 쐬고 비로소 빛을 보게 된 것이지요.
소재 선생은 조선 전기의 시인 · 정치가 · 사상가로 영의정을 지낸 인물입니다. 그가 활동한 16세기는 사회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한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사상적 측면에서는 오히려 성리학을 주축으로 주자학이 이론적 확립을 굳건히 하게 되는데요. 특히 이 시기에는 조광조, 서경덕, 이언적, 이황, 기대승, 이이 등 성리학사상 주목할 만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이들 못지않게 그가 일군 학문과 사상 또한 매우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세상에 온전히 드러나지 못하고 묻혀 있는 게 안타깝기만 합니다.
조선 시대의 성리학은 정주학이 주류를 이루었으므로 경전의 해석도 정주의 주해를 그대로 답습하였습니다. 그래서 간혹 학자들이 사물의 상태, 특히 정신상태의 적절한 표현을 도교와 불교의 어구語句로 구사驅使했다면 이단異端으로 몰아세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소재의 학문을 '선', '양명학'이라 하는데, 요즘 사회 분위기식으로 말하면 '좌파'로 명명하는 것이지요.
소재의 학문을 정통 유학(주자학)과 선을 긋는 것은 기득권의 사상 쪽에서 만들어내는 이른바 고전적인 방법 중 하나입니다. 선긋기를 주창하는 쪽에서 본다면, 소재의 학문은 잘라내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당시 사상계에서 뚜렷한 입지를 가졌다는 말일 것입니다.
소재는 『논어』를 2,000번이나 읽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소재가 체험적으로 학문에 접근하는 태도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소재는 하나의 학문만을 고수하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학문이든 그 자신의 체험에 입각하여 폭넓게 이해하고 탐구했으며, 그 장점을 취하려는 매우 개방적인 학문 자세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소재는 20여 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였습니다. 부모형제, 그리고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애절함으로 그는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렸을까요. 그러나 그는 유배생활의 고통과 비애를 온몸으로 끌어안아 도리어 자기 자신을 가다듬고 학문에 전념하는 계기로 승화시켜,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辯」,「집중설執中說」등을 남겼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게 유학자로서 그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학문적 성숙 후에 정치 생활을 한 것도 주목할 만하지요.
유학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學'이라든가 '심학心學'이라고 불리울 만큼 인간에 있어서의 마음 수양을 특별히 중시했습니다. 마음의 수양이란 인간의 자기 형성, 즉 개개인의 인격적 · 도덕적 주체의 확립을 의미합니다.
소재는 인심도심체용설人心道心體用說을 주장했는데요. 당시 성리학자 일반은 인욕人欲을 불선不善으로 보고 금욕을 주창하고 있지만 그는 인욕을 긍정합니다. 명나라 나정암의 설을 토대로 하고 있는데, 거기에 머물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 그것을 자신의 삼힉心學으로 이루어냈으니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양명학자라고 할 수 있지요.
소재는 모든 공부의 핵심으로 성의誠意를 강조하고 '격물格物'이 바로 '명명덕明明德'의 공부이며 '성의'가 바로 '격물'임을 주장하였습니다. "마음을 성실하게 하여 온갖 위선과 삿된 생각이 사라지면 마음이 결국 천리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지요. 마음을 바로잡으면 이것이 바로 궁리가 되고 바로 명명덕이 된다는 왕양명의 공부론을 지지하는 것이지요.
그는 특정 학문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만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주기론을 주장하는 학자이면서도 주리론은 그것대로 또한 논리가 있다는 상대주의적 입장을 인정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소재의 사상체계를 이루는 사유관념은 특정의 논리만을 그대로 수용하기보다는 '논리체계의 정당성 여부'에 중점이 놓여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그의 학문이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조선 500년 동안 정주학程朱學 을 으뜸으로 하는 학문적 분위기 속에서도, 유교 영역 밖의 새로운 풍조로 불어오던 신학문, 즉 왕양명(왕양명, 1472~1529)의 학문(양명학), 나정암의 학문 을 수용하였습니다. 거기에 도교 · 불교의 사상을 긍정적으로 이해하여 학문과 사상, 이념, 사고의 잣대를 주자에서만 찾지 않고 스스로 진지하게 고민하며 자신의 세계를 밀고 나아갔지요. 이는 창의롭고 자유로운 사색으로 기존의 엄숙주의적 전통과 단조로움을 넘어서는 호방한 학문 태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山下大地百千花 산하대지의 백가지 천 가지 꽃이
盡在尋常百姓家 다 평범한 백성의 집에 있는데
可笑舊都安處士 우습다! 옛 도읍의 안 처사는
自知其性有增加 본성에 더할 바 있다고 알고 있구나
소재 선생이 사내옹四耐翁 안경창安慶昌에게 준 시 「별사내옹別四耐翁」인데요. "산하대지의 백 가지 천 가지 꽃이/ 다 평범한 백성의 집에 있다"는 구절은 "산하대지가 모두 법왕의 몸"이라는 불가의 말에서 온 것입니다. "평범한 백성이 모두 부처이자 성인'이라는 것이지요.
모든 사람이 더할 것 없는 완전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믿음,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차이나는 그대로 다 인정하는 소재 선생의 정신이 뜨겁게 다가옵니다. 참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부처"요, 이 세상 사람 모두 꽃이 아니겠는지요.
소재 선생 유품 이사하던 날, 옥연사 앞마당은 숙연한 가운데 흥성흥성하였습니다. 햇살은 수백 년을 걸어오느라 부르튼 책들을 어루만지고, 맑은 새소리도 유품들 위로 낮게 내려와 앉았습니다. 또 작은 시첩들 하나하나 숨결을 불어넣는 사람들 손길은 가슴을 뻐근하게 했답니다. 천지간을 운행하는 바람은 그렇게 의연하게, 여린 숨결 다시 펄럭이게 하고 이윽히 세상 저편 봄볕까지 끌어당겨 왔습니다. 사람 인人자 맞배지붕 옥연사, 모처럼 저린 어깨 쭉 펴는 날이었지요.
거처를 옮긴 그들은 지금 어찌 지내고 있는지, 사람들 눈과 가슴에서 어떤 빛으로, 어떤 향기로 꽃 피우고 뿌리내리고 있는지 사뭇 궁금합니다. 지금은 진달래 산천, 붉은 꽃불 번지는 봄입니다. 거기 거처 옮긴 진달래꽃 나무에도 꽃불 당겨지면 당신, 봄바람 타고 건어오시기 바랍니다. 소재 노수신! 그를 만나시기를, 그래서 팍팍한 삶의 그늘 걷어내며 꽃잎처럼 몸을 펴고 잠시 환해지시기를 희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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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문집『바다로 가는 나무』에서/ 2018. 8. 8. <詩와 에세이> 펴냄
* 황구하/ 충남 금산 출생, 2004년 『자유문학』으로 등단, 시집 『물에 뜬 달』『화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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