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시집 · 공검 & 굴원

북극형 인간/ 정숙자

검지 정숙자 2018. 9. 23. 00:34

 

    북극형 인간

 

     정숙자

 

 

  육체가 죽었을 때 가장 아까운 건 눈동자다

  그 영롱함

  그 무구함

  그 다정함

  이, 무참히 썩거나 재가 되어버린다

 

  다음으로 아까운 건 뇌가 아닐까

  그 직관력

  그 기억력

  그 분별력

  이, 가차 없이 꺾이고 묻히고 만다

 

  (관절들은 또 얼마나 섬세하고 상냥했던가)

 

  티끌만한 잘못도 없을지라도 육신 한 덩어리 숨지는 찰나. 정지될 수밖에 없는 소기관들. 그런 게 곧 주검인 거지.

 

  비

  첫눈

  별 의 별 자 리

  헤쳐모이는 바람까지도

 

  이런 우리네 무덤 안팎을 위로하려고 철따라 매스게임 벌이는지도 몰라. 사계절 너머 넘어 펼쳐지는 색깔과 율동까지도

 

  북극에 길든 순록들 모두 햇볕이 위협이 될 수도 있지

  우리가 몸담은 어디라 한들 북극 아닌 곳 없을 테지만

 

  그래도 우리는 정녕

 

  햇빛을, 봄을 기다리지, 죽을 때 죽더라도

  단 한 번 가슴 속 얼음을 녹이고 싶지

    -『시와 정신』 2018-가을호 

 

    -------------------------------

  * 시집 『공검 & 굴원』(1부/ p. 44-45)에서/ 2022. 5. 16. <미네르바> 펴냄

  * 정숙자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외, 산문집 『행복음자리표』외

'제10시집 · 공검 & 굴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은 생선의 눈/ 정숙자  (0) 2018.11.06
얼음은 직선으로 부서진다/ 정숙자  (0) 2018.09.27
완전명사/ 정숙자  (0) 2018.09.16
차원 이동/ 정숙자  (0) 2018.09.04
극지 행(行)/ 정숙자  (0) 2018.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