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밀어 넣기
조연향
태양 가까이에서 새가 울었다
길을 잃었다가 겨우 찾아든 비망록 앞에서
오래되지 않은 음각들을 읽어내린다.
비를 맞고 싶고 바람을 쬐고 싶지만
어떤 틈새도 철저히 차단되어 버렸다
혹시 새싹이라도
벌레라도
나방이라도 날아오를까 봐
까만 대리석으로 어둠을 꽉 채우고 진공포장을 해 버렸다
바람이
계곡 저 너머로 노을 한 자락 밀어 넣는다.
외로운 유골일수록 햇빛에게 쉬이 도굴당할 수 있으니
죽음을 도둑맞을 수 있으니 굳게 눈꺼풀이 심장이 고이 잠들 수
있을 만큼 두껍게 잠가야지
관棺 속의 관棺 하나 무사히
다 가두었다고 생각한 다음에야 큰 아량처럼
꽂아 놓은 백합 한 다발
언젠가 네가 보이는 창가에 꽂아 두고 싶었던 꽃이
너의 뼈 바깥에서 고개 떨구고 있다
묻어도 도굴되고야 말 그 죽음의 길은 지는 태양만이 알까
네 기억은 이제 슬픔이라든가 느닷없음을 망각한 채
낯선 길들을 산책해야 하리라
숲 덤불을 헤치고
더 이상 돌아갈 길을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일
슬픔도 하나의 격식일 뿐 네가 누워 있는 납골당에 오면
하나도 슬프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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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토네이토 딸기』에서/ 2018. 5. 25. <서정시학> 펴냄
* 조연향/ 경북 영천 출생, 1994년 《경남신문》신춘문예 · 2000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 『제1초소, 새들 날아가다』『오목눈숲새 이야기』, 저서 『김소월 백석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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