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 씨를 찾아간 이승훈 씨
이승훈 (1942-2018, 76세)
이승훈 씨는 바바리를 걸치고 흐린 봄날
서초동 진흥아파트에 사는 시인 이승훈 씨를
찾아간다 가방을 들고 현관에서 벨을 누른다
이승훈 씨가 문을 열어준다 그는 작업복을
입고 있다 아니 어쩐 일이오? 이승훈 씨가
놀라 묻는다 지나가던 길에 들렀지요 그래요?
전화라도 하시지 않고 아무튼 들어오시오
이승훈 씨는 거실을 지나 그의 방으로 이승훈 씨를
안내한다 이승훈 씨는 그의 방에서 시를 쓰던
중이었다 이승훈 씨는 원고지 뒷장에 샤프 펜슬로
흐리게 갈겨 쓴 시를 보여준다 갈매기 모래, 모래,
벽돌이라고 씌어 있다 아니 이게 무슨 말이오?
이승훈 씨가 황당하다는 듯이 이승훈 씨에게
묻는다 갈매기는 강박관념이고 모래는 환상이고
벽돌은 꿈이지 뭐요? 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틀렸어요 갈매기는 모래고 모래는
벽돌이고 벽돌이 갈매깁니다 틀림없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바다는 갈매기가 아닙니다 그건 모래가
벽돌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벽돌은 바다가
아니니까요 바라리를 걸친 이승훈 씨와 작업복을
입은 이승훈 씨가 계속 싸운다 마침내 화가 난
이승훈 씨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친다
좋아요 좋아! 문을 쾅 닫고 사라진다
-전문-
▶ 한국 시의 현대성을 여는데 공을 세우다(발췌)_ 이관일(시인)
이 작품에 대해 평론가들은 "실제 현실 속의 이승훈이라는 시인이 자신의 내면 풍경 속에 인격화된 두 명의 이승훈을 들장시켜 현실 속의 이승훈과 시 속의 이승훈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의미의 혼란을 가져옴과 동시에 시 속에서 벌어진 모습이 현실과 무관치 않음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은 것으로 이 시를 감상했다. 관념적 대상인 분열된 '자아'에 옷을 입혀 소설 속 등장인물처럼 서사적 전개를 통해 살아 있는 실제 인물처럼 대화체를 구사해서 그런지 짤막한 소설의 한 장면을 읽는 착각 속에 빠뜨리는 시이다."라고 극찬하고 있다. 또한 "시를 쓰는 과정을 통해 시인의 분열된 자의식을 보여줌과 동시에 자신이 쓴 시어의 의미마저도 명확하게 규정지을 수 없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설명을 붙였다./ 그러나 이 시를 단순히 시적 자아의 분열과 시어의 한계에 대한 자의식에서만 국한해 감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시인의 내면 풍경에 나타난 분열된 자의식은 곧 언어가 가지고 있는 한계인 동시에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분열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서정시가 끝난 시대, 순수도 서정도 폭력이다. 순수는 불행을 모르고 서정은 불순하고 결국 난 시를 쓰지 않으려고 시를 쓴다"라며 시를 행해 용맹 정진했던 이승훈 시인은 2018년 1월 16일 76세의 나이로 진짜 이승훈 씨를 만나러 먼 길을 떠났다. 시인의 영생과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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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시詩』2018-3월호 <그의 삶 그의 시_ memories>에서
* 이관일/ 시인, 본지 편집스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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