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뎅이
김수영(1921-1963, 46세)
너의 앞에서는 우둔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좋았다
백 년이나 천년이 결코 긴 세월이 아니라는 것은
내가 사랑한 테두리 속에 끼여있기 때문이 아니리라
추한 나의 발밑에서 풍뎅이처럼 너는 하늘을 보고 운다
그 넓은 등판으로 땅을 쓸어가면서
네가 부르는 노래가 어디서 오는 것을
너보다는 내가 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추악하고 우둔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너도 우둔한 얼굴을 만들 줄 안다
너의 이름과 너와 나와의 관계가 무엇인지 알아질 때까지
소금 같은 이 세계가 존속할 것이며
의심할 것인데
등 등판에 광택 거대한 여울
미끄러져가는 나의 의지
나의 의지보다 더 빠른 너의 노래
너의 노래보다 더 더한층 신축성 있는
너의 사랑
-「풍뎅이」1953년, 전문
▶ '사물-이미지'의 세 가지 양태(발췌)_ 이성혁
1950년대 김수영의 시편들 중에는 그야말로 사물 곤충과 같은 생물을 포함한 의 생리를 꿰뚫어보고자 하는 시편들이 많다. 위에서 인용한 풍뎅이, '구라중화(글라지오라스)', 거미, 향로, 플래스터(plaster), 나비, 영사관, 책, 헬리콥터, 팽이, 수은로, 유리창, 연기, 레이팜탄, 흰개미, 병풍, 눈, 지구의, 자, 폭포, 하루살이, 꽃, 비 등 1950년대 김수영은 사물의 시인이라고 할 만큼 사물을 주제로 하여 많은 시를 쓰고 있다. 위의 「풍뎅이」도 그러한 시편들 중 한 편이다. 그런데 「풍뎅이」에서 알 수 있듯이, 김수영은 사물의 선명한 이미지를 포착하고자 하는 이미지즘이나 사물을 지성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모더니즘에서 더 나아간다. 그는 사물의 보이지 않는 안쪽으로 파고들어가면서 포착한 사물의 이면을 자신의 윤리적 삶과 연결하고, 그 사물의 이면적인 이미지를 상상력을 통해 자신의 삶을 갱신하는 힘이 되는 이미지로 변환한다. 프랑시스 퐁주가 자기 자신을 괄호치고 대상 사물에 몰입함으로써 사물의 어두운 면에 감추어진 이미지를 말로써 드러내고 그리하여 사물로 하여금 말할 수 있도록 자신의 시작詩作을 밀고 나갔다면, 김수영은 사물과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사물을 바로 보려고 하고 그리하여 사물의 이면에 있는 이미지를 부상浮上시키고 또한 변환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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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표현』 2018-3월호 <기획특집|사물과 상상력>에서
* 이성혁/ 2003년 《대한매일신문》신춘문예로 펑론 부문 당선, 저서 『불꽃과 트임』『모더니티에 대항하는 역린』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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