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성채
이상(1910-1937, 27세)
사랑받은 기억이 없다. 즉 애완용 가축처럼 귀여움을 받은 기억이 전혀 없
는 것이다.
무서운 실지(實地) 특기해야 할 사항이 없는 흐린 날씨와 같은 일기
(日記) 긴 일기다.
버려도 상관없다. 주저할 것 없다. 주저할 필요는 없다.
모두가 줄곧 꼴보기 싫다. 그들은 하나 같이 그를 「의리없는 놈」으로 몰
아 세운다. 그리고 교활하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그런 정도로일까. 「그런
일이 있으면 있는 대로 고쳐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였다. 그것
도 정말일까. 모두를 미워하는 것과 개과천선하는 일이 양립될 수 있는 일
일까.
아니다. 개과한다는 것은 바로 교활해 간다는 것의 다른 뜻이다. 그래서
그는 순수하게 미워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때는 민족마저 의심했다. 어쩌면 이렇게도 번쩍임도 여유도 없는 빈상
스런 전통일까 하고
하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가족을 미워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는 또 민족을 얼마나 미워했는가. 그
러나 그것은 어찌보면 「대중」의 근사치였나보다.
사람들을 미워하고 반대로 민족을 그리워하라, 동경하라고 말하고
자 한다.
커다란 무어라고 형용할 수 없는 덩어리의 그늘 속에 불행을 되씹으며 웅
크리고 있는 그는 민족에게서 신비한 개화를 기대하며
그는 「레브라」와 같은 화려한 밀타승(密陀僧)의 불화(佛畵)를 꿈꾸고 있다.
새털처럼 따뜻하고 또한 사향처럼 향기짙다. 그리고 또 배양균처럼 생생
하게 살아 있다.
성장함에 따라 여러가지 이상한 피를 피의 냄새를 그는 그의 기억의 이면
에 간직하고 있다.
열화 같은 성깔 푸른 핏줄이 그의 수척한 몸뚱이의 쇠약을 여실히 나타내
고 있다.
어느날 손도끼를 들고 그 아닌 그가 마을 입구에서부터 살륙을 시작
한다. 모조리 인간이란 인간은 다 죽여버린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다
죽여버렸다.
가족들은 살려달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에잇 못난 것들 ). 그러나 죽
은 그들은 눈을 감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들의 피살을 아직도 믿지 않았다(백치여, 노예여).
창들이 늘어서 있다. 아무데서나 메탄가스와 오존이 함부로 들락거린다.
무엇으로 호흡을 하고 있는지 증거가 없는 가축들의 상판이 영어(囹圄)를
자랑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는 아무하고도 친밀히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을 보지 않는다.
언제나 구부정하게 어물거리고 있다.
들어가볼까? 문을 찾아야지.
목소리를 들으면 식별할 수 있다. 피는 피를 부르는 철칙을
그는 찬찬히 명찰을 살피며 걸어갔다. 비슷한 글자들이 그들의 명의를 어
지럽히고 있다.
그중에서 간신히 그 자신의 이름을 찾아내자 이번에는 그가 주저하는 것
이다.
이것은 이런 연유로 해서 성(城)이었다.
이직도 그것은 굳게 봉쇄된 이름뿐인 성이었다. 그들은 결코 서로 자신의
직분 혈액형을 바꾸지 않는다.
해가 지면 그들은 원경의 조망조차 그치고 깊숙이 농성하여 낮은 목소리
로 음모한다.
멸망할 것을 악취가 날 것을 두통이 나야 할 것을 죄 많을 것을 구토할 것
을 졸도할 것을.
등불은 꺼졌다. 꺼진 것 같으나 단지 촉수를 낮추어 놓은 것뿐이다.
곤충도 오지 않는다. 쥐들은 곧잘 먼지 이는 뒷골목에 죽어 나뒹굴고 있었다.
가축을 치는 일은 없었다. 그들은 악착같이 먹이와 혼동된 고추를 심었다.
고추는 고등동물 예를 들면 소, 개, 닭의 섬유 세포에 향일성으로 작용하
여 쓰러져가면서도 발효했다.
성은 재채기가 날 만큼 불결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창들의 세월은 길고
짧고 깊고 얕고 가지각색이다.
시계 같은 것은 엉터리다.
성은 움직이고 있다. 못쓰게 된 전차처럼. 아무도 그 몸뚱이에 달라붙은
때자국을 지울 수는 없다.
스스로 부패에 몸을 맡긴다.
그는 한난계처럼 이러한 부패의 세월이 집행되는 요소요소를 그러한 문
을 통해 들락거리는 것이다.
나와서 토사(吐瀉) 들어가서 토사. 나날이 그는 아주 작은 활자를 잘못 찍
어 놓은 것처럼 걸음새가 비틀거렸다.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모든 것이 시작될 때까지. 그리하여 모든 것이 간
단하게 끝나버릴 아리송한 새벽이 올 때까지만이다.
-1935. 8. 3.-
▶ 편저자의 말> 세계문학사에 우뚝 서게 될 날을 기대하며(발췌)_ 신범순
이상의 시들은 이미 여러번 간행된 기존의 『이상전집』들에서 한 권으로 묶여 나왔었다. 그러나 『이상시전집 꽃속에꽃을피우다2』 수정확정판 시집은 새롭게 구성된 것이다. 기존 전집들에서 소개된 시편들은 주해본 (『이상시전집 꽃속에꽃을피우다1』)에서 '원본'들로 다뤘다. 그래서 수정확정판 시집은 그와 차별화시켜 한글화된 텍스트로 구성했다. '원본주해'판의 원본 비평들을 통해 원문(원고 노트의 일어시 원문과 이상 생전시 발표된 일문시 한글시 원문)을 정확히 반영하지 못한 부분들을 수정해서 '수정확정'판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등은 본래 이상의 의도를 가급적 존중했다. 현대 맞춤법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지나치게 낯설거나 기이하게 보일만한 부분만 현대적인 어법에 가깝게 수정했다. 띄어쓰기는 전적으로 이상의 독자적인 의도가 반영된 원문 그대로를 따르도록 노력했다. 원문을 알 수 없는 경우는 초창기 번역자의 번역을 따랐다./ 이번 시집에서는 기존의 전집들에서 수필로 구분한 여러 작품을 '산문시' 항목으로 불러왔다.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산문시들과 비교해 볼 때에도 이 정도의 시적 산문들은 충분히 '산문시'로 분류되어 마땅하다. 「얼마 안되는 변해」와 「무제 - 육면거울방」「공포의 성채」등이 「구두」와 함께 이렇게 해서 산문시 항목에 배치되었다. 이 시적 산문들의 강렬한 압축과 상징은 다른 어떤 시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그리고 이 '산문시'들을 시집 속에 앉혀놓았을 때 비로소 그와 연관되는 다른 시들도 더 생생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나는 「공포의 성채」에 나오는 이상의 독특한 '城(성)', 즉 '城砦(성채)'이면서 姓(성)이면서 동시에 性(성)이기도 한 미묘한 '성'을 알게 되었다. 이 '성'의 여러 창문을 들락거리는 '나'의 이야기를 몰랐다면 이상의 여러 시편들을 관통하는 '거울'의 주제를 정확하게 해독할 수 없었을 것이다. 거울세계와 '육면으로 된 거울방'(「무제-육면거울방」에 나오는) 그리고 「오감도」의 「시제14호」의 폐허가 된 역사의 성채와 바로 그 뒤 시편 「시제15호」의 거울 이야기들을 하나로 꿰뚫어보기 위해서는 「공포의 성채」가 필요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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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범순 수정확정 『이상시전집 꽃속에꽃을피우다 2』2017. 12. 12. <나녹那碌> 펴냄
* 신범순/ 충남 서천 출생, 저서 『이상의무한정원삼차각나비』,『노래의 상상계』('수사'와 존재생태 기호학),『이상문학연구-불과 홍수의 달』외, 포항미술관(poma)에서 한국거석문명에 대한 전시를 했고 한국과 세계 암각화에 대한 여러 번의 강연을 했다. 현재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이상 학회장, 한국현대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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