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나의 근작시

날 선 날

검지 정숙자 2017. 10. 22. 13:47

 

 

    날 선 날

 

     정숙자

 

 

  여기 태어나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 왔을지라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면

  무엇이 무엇인지 몰랐을 것이다

 

  오늘은 또 뭐냐?

 

  살아본 적 없는 시간

  와본 적 없는 숲길이다

 

  어두울 수밖에 무거울 수밖에 대처 불능일 수밖에 나무로 깎은

새라도 함께 울어준다면 좀 아늑해질까. 이럴 때 우리는 운명을 책잡지

만 운명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약골인 것을,

 

  운명이 만일 우리의 행운을 쥐고 있다면 왜 이토록 찢긴 태양을 바라

보고만 있을 것인가. 둥근 아늑한 날들을 선사하지 않을 것인가. 운명마

저도 우리가 돌봐야 할 존재일는지 모른다.

 

  몸소 겪지 않고서야 어찌 한 세계를 알 수 있단 말인가

 

  견딤의 뒤에 남는 말

  겪음이란 아픈 말이다

 

  또 한 번 날이 밝는데

  (모든 시간은 첫 시간이다)

  아무리 베어져도 숙달되지 않는 이 칼날 앞에서

 

  다만 슬픈 눈

  그만이 능히 허공을 경작한다

 

 

    ---------------

   *『열린시학』2017-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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