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선 날
정숙자
여기 태어나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 왔을지라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면
무엇이 무엇인지 몰랐을 것이다
오늘은 또 뭐냐?
살아본 적 없는 시간
와본 적 없는 숲길이다
어두울 수밖에… 무거울 수밖에… 대처 불능일 수밖에… 나무로 깎은
새라도 함께 울어준다면 좀 아늑해질까. 이럴 때 우리는 운명을 책잡지
만 운명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약골인 것을,
운명이 만일 우리의 행운을 쥐고 있다면 왜 이토록 찢긴 태양을 바라
보고만 있을 것인가. 둥근 아늑한 날들을 선사하지 않을 것인가. 운명마
저도 우리가 돌봐야 할 존재일는지 모른다.
몸소 겪지 않고서야 어찌 한 세계를 알 수 있단 말인가
견딤의 뒤에 남는 말
겪음이란 아픈 말이다
또 한 번 날이 밝는데
(모든 시간은 첫 시간이다)
아무리 베어져도 숙달되지 않는 이 칼날 앞에서
다만 슬픈 눈
그만이 능히 허공을 경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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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시학』2017-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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