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화「우리 오빠와 화로」전문, 박남철「독자놈들 길들이기」전문, 이성선「큰 노래」전문>
시적 미학의 특수성과 독자와의 관계망
김윤정
1. 작가와 독자의 소통의 관계
모든 문학 작품은 작가의 개성과 자발성에 의해 쓰여지지만 그것이 항상적으로 독자를 향한 발언임이 전제되는 것도 사실이다. 작가는 자신의 목소리를 낼 때 이미 독자의 수용을 의식하게 된다. 작가와 독자와의 의사소통의 관계는 무의식적 차원에서 구조화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품이 작가로부터 떠날 때부터 작품이 불가피하게 독자와의 의사소통의 관계망을 수용하게 한다. 요컨대 작가와 독자는 모두 작품을 매개로 하여 서로를 수용하고 소통하는 관계 속에 놓여 있다.
한편 작품을 둘러싸고 그것이 작가와 독자 사이의 의사소통의 관계라고 하는 대전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작가들이 같은 정도로 독자와의 대화에 개입하려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일상의 말들이 적극적인 대화와 소극적인 대화 내지 내적 독백 등의 다기한 범주로 구분되는 것처럼 작품들 또한 미학의 특수성에 따른 독자와의 차별적 관계망을 구축하고 있다. 가령 참여문학이라든가 계몽주의의 미학 등 이념성을 띠는 작품의 경우라면 강경한 어조로 독자와의 적극적 교섭을 추구하겠지만 서정 시학이라든가 아방가르드 미학은 상대적으로 독자와의 교섭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는다 할 수 있다. 이들 미학은 오히려 내면적 사색에 주목함으로써 독자와의 대화에 소극적인 어조를 띠는 것이다.
이러한 시의 미학적 특수성에 대하여는 시의 미적 구조에 관한 매우 엄밀한 고찰이 요구될 것에겠지만, 일찍이 문학 이론 가운데 수용미학에서는 작품의 평가 기준을 독자와의 교섭의 정도에 둔 바 있다. 수용미학에서는 작품의 질적 평가 기준을 독자의 참여 정도로 파악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독자의 참여란 작품에 내재하는 의미와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독자가 어느 정도로 적극성을 발휘하는가의 문제인데, 수용미학의 관점에서는 작품에서 드러난 가치가 분명하고 의미 구조가 단순할 경우 의미 구현을 위한 독자의 참여를 유도해내지 못한다고 하여 이를 낮은 수준의 작품이라 평가하는 반면 작품의 구조가 표면화되어 있지 않고 난해한 경우 이를 해독하기 위한 독자의 자발적인 개입을 끌어낸다는 이유로 높은 수준의 작품이라 평가한다. 적정 정도의 난해성은 이를 이해하기 위한 독자의 적극적인 사유를 유도하는 것이며 이러한 방식의 작품 수용이 창조적이고 생산적이라는 것이다. 수용미학자들이 볼 때 리얼리즘 문학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후자에 해당하는 작품은 모더니즘 문학이다.
수용미학의 이러한 접근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라는 대립 구도 하에 상대적으로 강한 미학성을 지닌 모더니즘 문학을 옹호함에 따라 문학 작품에서의 미학성의 가치에 관해 시사점을 준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예술 작품에서의 미적 기법들이 단순히 기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독자와의 매개 지점에 해당한다는 관점 또한 제공하고 있어 주목된다. 그러나 수용미학은 독자의 의미 해독에의 개입을 유도하는 것이 작품의 전적인 의미와 가치에 해당하는가 하는 문제와 독자와의 긴밀한 교섭을 가능하게 하는 미학성이란 무엇이며 또한 독자와의 교섭이 과연 미적 기교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해답을 주지 못한다. 즉 미적 기교란 과연 독자와의 효과적인 교섭에 기여하는가 혹은 오히려 발해하는가? 작품이 지닐 수 읶는 의미란 유독 의미 해독의 차원에 놓이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그 외의 차원에서의 가치 구현은 가능한 것인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일은 우리 시단의 미학의 성격을 가늠하는 일이 될 것이며 나아가 향후 우리의 시가 추구해야 할 시적 의미와 가치에 관해 논하는 일이 될 것이다.
2. 현실주의 미학과 '대중성'의 문제
현실주의 미학은 미학성을 떠나 문학의 현실에 대한 윤리적 개입을 우선시하는 경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독자의 미적 감수성이라든가 개인적 서정보다 집단적 이념의 보편화에 가치를 두고 있다. 현실주의 문학에 의해 독자들은 세련된 미적 취향에 노출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사회의 공동선에 관해 의식의 각성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데, 여기에는 사회성과 개인성, 정치성과 미학성이라는 문학의 기본 개념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이 항상적으로 따라오게 된다. 이들 사이의 갈등 해소를 위한 논쟁은 문학 이론의 역사가 될 정도로 뿌리 깊은 것이다.
우리 시사에서 본격적으로 현실주의 미학이 등장한 것은 주지하듯 1920년대 계급주의 문학으로부터이다. 카프에 의한 계급주의 문학은 대중에게 사회주의 이념을 고취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이루어졌다. 그것은 대중으로 하여금 노동자 계급 의식을 각성시켜 이들이 계급투쟁의 전선에 나설 것을 촉구하였다. 당시 사회주의 이념은 곧바로 우리 나라의 민족해방 사상에 닿아 있었다는 점에서 계급주의 문학은 가장 현실주의적인 문학이기도 하였다.
계급주의 문학의 목적이 대중의 의식의 각성과 투쟁의 조직에 있던 까닭에 이는 필연적으로 독자와의 전달과 수용의 관계를 고려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독자는 작가와 수신자와 발신자라고 하는 긴밀한 의사소통 관계 속에 놓이게 된다. 독자는 언제나 작가에 '음험한' 의도 아래 목적의식적으로 방향지워지도록 되어 있다. 현실주의 미학에서 어쩌면 작가와 독자는 갑과 을의 수직관계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하자면 독자의 참여 없이는 그 가치 구현이 불가능해지는 까닭에 현실주의 미학은 필연적으로 '대중성'의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작품이란 현실주의 미학에서는 상립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1920년대 후반 카프진영에서 펼쳐졌던 예술 대중화론은 그러한 맥락에서 도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이 운동을 주도했던 팔봉은 "지극히 재미없는 정세에서 카프문학이 나아갈 방향을 상실하고 독자 대중으로부터 유리되었다"고 진단하면서 카프의 현실주의 문학이 대중에게 수용될 수 있는 조건에 대하여 고민한 바 있다. 그는 독자로부터 멀어진 카프문학을 다시 독자에게로 가져오는 것을 당면한 첫 번째 과제로 설정하였고, 그 일환으로 이른바 '재미있는 문학'의 구현을 내세우게 되었다. 여기서 '재미있다'는 것은 사상성이 담보된 내용성의 적실한 구현, 즉 형상화의 방법적 문제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는 독자에게 흥미있는 요소를 제공하지 않는 한 어떤 훌륭한 이념이라 할지라도 카프문학의 가치와는 무관하다고 인식하였던바, 그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그 이전에 있었던 이념의 '내용'과 그것의 구현이라 하는 '형식' 간의 관계 정립이라 하는 관점의 연장선에서 제시된 것이었다.
사랑하는 우리 오빠 어저께 그만 그렇게 위하시던 오빠의 거북무늬 질화로가 깨어졌어요.
언제나 오빠가 우리들의 '피오닐' 조그만 기수라 부르는 영남永男이가
지구에 해가 비친 하루의 모-든 시간을 담배의 독기 속에다
어린 몸을 잠그고 사 온 그 거북무늬 화로가 깨어졌어요.
그리하여 지금은 화젓가락만이 불쌍한 영남이하구 저하구처럼
똑 우리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남매와 같이 회롭게 벽에 가 나란히 걸렸어요
오빠…
저는요 저는요 잘 알았어요.
왜 그날 오빠가 우리 두 동생을 떠나 그리로 들어가실 그날 밤에
연거푸 말은 궐련卷煙을 세 개씩이나 피우시고 계셨는지
저는요 잘 알았어요 오빠.
언제나 철없는 제가 오빠가 공장에서 돌아와서 고단한 저녁을 잡수실 때 오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가 난다고 하면
오빠는 파란 얼굴에 피곤한 웃음을 웃으시며
…네 몸에선 누에 똥내가 나지 않니- 하시던 세상에 위대하고 용감한 우리 오빠가 왜 그날만
말 한마디 없이 담배 연기로 방 속을 메워버리시는 우리 우리 용감한 오빠의 마음을 저는 잘 알았어요.
천정을 향하야 기어올라가던 외줄기 담배 연기 속에서- 오빠의 강철 가슴속에 박힌 위대한 결정과 성스러운 각오를 저는 분명히 보았어요.
그리하여 제가 영남이의 버선 하나도 채 못 기웠을 동안에
문지방을 때리는 쇳소리 바루르 밟는 거치른 구두 소리와 함께- 가버리지 않으셨어요.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우리 위대한 오빠는 불쌍한 저의 남매의 근심을 담배 연기에 싸두고 가지 않으셨어요.
오빠- 그래서 저도 영남이도
오빠와 또 가장 위대한 용감한 오빠 친구들의 이야기가 세상을 뒤집을 때
저는 제사기製絲機를 떠나서 백 장의 일 전짜리 봉통封筒에 손톱을 뚫어트리고
영남이도 담배 냄새 구렁을 내쫓겨 봉통 꽁무니를 뭅니다.
지금- 만국지도 같은 누더기 밑에서 코를 고을고 있습니다.
오빠- 그러니 염려는 마세요.
저는 용감한 이 나라 청년인 우리 오빠와 핏줄을 같이한 계집애이고
영남이도 오빠도 늘 칭찬하는 쇠 같은 거북무늬 화로를 사온 오빠의 동생이 아니어요?
그러고 참 오빠 아까 그 젊은 나머지 오빠의 친구들이 왔다 갔습니다.
눈물나는 우리 오빠 동무의 소식을 전해주고 갔어요.
사랑스런 용감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세상에 가장 위대한 청년들이었습니다.
화로는 깨어져도 화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않았어요.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닐' 영남이가 있고
그리고 모- 든 어린 '피오닐'의 따뜻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직도 더웁습니다.
그리고 오빠…
저뿐이 사랑하는 오빠를 잃고 영남이뿐이 굳세인 형님을 보낸 것이겠습니까?
슲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고마운 청년 오빠의 무수한 위대한 친구가 있고 오빠와 형님을 잃은 수없는 계집아이와 동생
저희들의 귀한 동무가 있습니다
그리하야 이다음 일은 지금 섭섭한 분한 사건을 안고 있는 우리 동무 손에서 싸워질 것입니다.
오빠 오늘밤을 새워 이만 장을 붙이면 사흘 뒤엔 새 솜옷이 오빠의 떨리는 몸에 입혀질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누이동생과 아우는 건강히 오는 날마다를 싸움에서 보냅니다.
영남이는 여태 잡니다 밤이 늦었어요.
- 누이동생
- 임화(1908~1953, 45세),「우리 오빠와 화로」전문
인용시는 팔봉이 눈물을 흘리며 읽었다는 임화의 「우리 오빠와 화로」의 전문이다. 팔봉이 이 시에 특히 주목하자 했던 것은 이념의 선도성이 아니라 경험의 보편성이었다. 팔봉은 임화의 '단편서사시'를 통해 정서의 공감대에서 오는 독자의 수용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요컨대 팔봉은 프로문학에 세속성과 사상성을 적절히 가미하여 개념화된 프로문학으로부터 멀어진 독자들을 다시금 계급 투쟁의 전선에 참여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의도와는 달리 그의 예술 대중화론은 프로문학 측의 비판을 받았고 심지어 자신의 '소시민성'을 자기비판하는 임화의 기세에 눌려 철회되고 만다. 현실주의 미학의 원칙은 사상성을 떠나서는 그 어떤 경우라도 정당시될 수 없다는 극좌적 논리에 밀려난 것이다.
팔봉이 제기한 문제는 모든 문학 작품이 지니고 있는 의사소통의 구조적 관계라는 대전제 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서 작품의 독자에의 수용성을 진지하게 고민한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작품의 유통이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던 전근대와 달리 개인의 읽기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상황 속에서 개인의 정서에의 배려가 근대 문학의 필연적인 조건이었음을 고려할 때, 팔봉의 문제 제기는 사회주의 혁명 실현이라는 절대 가치를 위해서라도 필수적으로 고려되었어야 할 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계급성에 대한 조급적 태도는 이러한 저변의 맥락을 충실히 인지하지 못하였고, 결국 카프문학은 대중과의 이반 속에서 곧 해체되는 운명을 겪게 되었다.
당시 프로문학이 걸었던 일련의 과정은 문학의 기본적 관계틀이 작가와 독자의 상호관계을 떠나서는 성립할 수 없다는 초보적인 진리를 외면한 결과에 해당함을 말해준다. 독자의 존재를 무시한 카프문학은 공식주의라든가 분파주의 같은 기계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현실주의 문학이 아무리 훌륭한 사상성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독자와의 수용 관계를 외면할 경우 그 가치 실현에 실패하게 됨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필봉의 예술대중화론에서도 읽을 수 있던 것처럼 오히려 현실주의 문학일수록 대중의 수용의 측면에 댛 보다 더 진지한 성찰을 수행해야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고민은 일차적으로는 사상의 정립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와 함께 문학 작품의 형상화의 문제와 관련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예술대중화론은 아무리 좋은 사상성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대중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면 존립근거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일러주었던바, 문학과 독자의 친숙성 없이 사상의 전파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당시 현실주의 미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이었던 것이다.
3. 아방가르드 미학의 시적 의미
아방가르드란 넓은 의미에서 보면 모더니즘의 한 갈래이다. 그럼에도 모더니즘의 사조 가운데에서 아방가르드를 분리시켜 논의하는 것은 이 미학이 갖고 있는 과격한 시학적 특색 때문일 것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아방가르드 시학은 전통적인 시의 관점을 부정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기존에 관습적, 습관적, 규범적으로 알려지고 수용되던 것들에 대한 반항적 사유 속에서 무언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하는 것이 아방가르드 미학이 갖는 근본 의의일 것이다.
새로움이나 신선함을 추구하는 아방가르드 미학의 뿌리는 러시아 형식주의이다. 문학의 과학화, 참신한 것의 문학성을 추구한 이들이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소위 '낯설게 하기' 효과였다. 이에 따라 이들은 시적 인식의 확장에 미학의 목표로 삼고 기존의 관습적인 것들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낯설게 하기'의 의장은 아방가르드 미학에 이르러 작가와 독자의 관습적 관계에 대해서도 일대 변혁을 요구하게끔 만들었다. 이들의 관점에서 보면, 작가와 독자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전통적 의미의 작가라든가 독자는 기존의 숨관화된 관계와 달리 전혀 새로운 형태의 작가, 독자가 되어야 했다. 작가 곧, 저자란 더 이상 의미의 고정체이자 의미의 중심이 아니게 된다. 중심이란 아방가르드 미학이 부정하는 첫 번째 조건인바, 푸코 식으로 이야기하면 저자란 하나의 인식 단위, 곧 에피스테메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발전하는 주체, 성장하는 주체가 전통적인 작가의 모습이라면, 아방가르드 미학에서의 주체는 지워진 주체, 사라진 주체가 본연의 모습이 된다.
저자가 사라졌으니 독자 또한 새로운 모습을 갖추어야 했다. 독자 역시 작가 못지않게 의미를 생산하는 조건으로서 따라서 독자 역시 기존의 관습틀을 벗어나야 했다. 전혀 새로운 형태의 독자가 출현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만들어진 것이다. 다음의 시는 그러한 시대적 흐름을 잘 대변하는 작품이다.
내 詩에 대하여 의아해하는 구시대의 독자놈들에게- 차렷
열중위엇, 차렷
이 좆만한 놈들이…
차렷, 열중쉬엇,차렷, 열중쉬엇, 정신차렷, 차렷, OO, 차렷, 헤
쳐모엿
이 좆만한 놈들이…
(야 이 좆만한놈들아, 느네들 정말 그따위로맊에 정신 못차
리겠어, 엉?)
차렷, 열중쉬엇, 차렷, 열중쉬엇, 차렷…
- 박남철(1953~2014, 61세),「독자놈들 길들이기」전문
아방가르드 시대의 작가는 전변했다. 그렇게 바뀐 작가에 의해 생산된 작품이니 독자는 "내 시에 댜하여 의아해"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들은 구시대의 독자일 수밖에 없다. 구시대의 독자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들은 시는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고정 관념, 틀에 박힌 시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중심일 수밖에 없다. 중심이란 계속해서 또 다른 중심을 만들어내고 결국에는 해체할 수밖에 없는 거대 권력이 된다. 아방가르드의 정신은 기왕에 형성된 작가와 독자의 관계는 일탈할 수밖에 없다. 작가는 이전의 작가가 아니고 독자 또한 이전의 독자가 아니다. 하나의 공통적 정서라든가 경험에서 묶이는 작가와 독자의 관계는 사실상 무너지게 된다.
이처럼 아방가르드 시학에서 작가와 독자는 서로에 대해 일탈을 요구하는 긴장된 관계 아래 놓이게 된다. 작가는 독자를 상대로 끝없는 일탈과 부정을 실험하게 되고 독자 역시 작품을 매개로 한 끊임없는 부정과 파괴를 시도한다. 작가와 독자 사에에는 고정된 중심의 해체라는 공동의 지향성만이 공유될는지 모른다. 어쩌면 작가와 독자는 기존의 관습과 규범에 대한 도전과 부정을 통해 서로의 얼굴을 보며 소통을 시도할는지 모른다. 아방가르드 미학에서 작가와 독자는 서로의 모습 속에 드리워진 고독의 그림자를 통해 서로의 모습을 보며 위안을 얻는 관계가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아방가르드 시학에서의 작가가 그만큼 자기의 세계로 멀찌감치 달아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은 독자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달아나 자신만의 고립된 세계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경향에 놓이게 된다. 독자의 수용은 아방가르드 작가들에겐 단지 옵션에 불과하다. 이들에게서 정서나 의미의 공통분모를 찾는 일이란 크게 의미있는 것이 되지 못한다. 아방가르드 미학에서 작가와 독자의 가장 강력한 공유망은 서로에게 부과되는 부정과 도전의 운동력이라 할 수 있다.
4. 서정미학의 시대적 가치
서정시란 리리시즘이 담보된 시 고유의 음역이다. 서정시는 언제나 있어 왔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것은 우리 시의 갈래에서 가장 전통적인 시학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어는 특정한 시대, 특수한 경우에 서정시가 강조되는 때가 있었다. 적으도 우리 시단의 80년대 말 90년대 초가 그러하지 않았던가 생각된다.
서정시가 특별히 주목되던 이 시기를 많은 문학인들은 '은유'의 회복에서 구했다. 이 시기에 '은유'는 서정시의 고유한 의장이면서 새로운 시대적 패러다임을 담는 독특한 시정신으로 받아들여졌다. '은유'가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요구될 때 그것은 더 이상 단순한 수사적 장치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이끄는 특수한 기능적 가치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왜 이 시기에 시의 은유성이 강조되었는가 하는 점에 있을 것이다.
지난 세기말은 모든 것이 일단락되던 시기였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거대담론의 대립이 무화되었는가 하면, 제3세계권을 휩쓴 군부통치가 사라지던 시기였다. 이들이 지배하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던 것이 문학적 저항이었을 텐데, 현실주의 미학이라든가 아방가르드적 해체의 정신이 그 주요한 일익을 담당했던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이들 미학이 추구한 것은 계몽과 해체의 정신이었는데, 이때 현실주의 미학은 선진적인 사고를 가진 작가층이 독자들에게 자신의 사상을 일방적으로 강요했다. 작가는 엘리트 의식의 꼭지점에서 독자를 다만 교화의 대상, 계몽의 대상으로 간주했을 뿐이었다. 독자는 다만 그들의 의식을 취사선택해서 받아들이는 대상에 해당되었다.
아방가르드 문학을 비롯한 해체두의 미학 역시 독자를 일방적 대상으로 인식했던 점은 현실주의 문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존의 관습을 전복시키고자 했던 작가의 불온 정신은 독자와의 정서적 공감대를 유도하기보다는 자신의 의도가 독재에게 일방적으로 전달되도록 요구했던 혐의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극단화가 낳은 결과가 역설적이게도 서정의 회복이라는 리리시즘의 복원으로 나타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큰 산이 큰 영혼을 기른다.
우주 속에
대붕大鵬의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설악산 나무
너는 밤마다 별 속에 떠 있다.
산정山頂을 바라보며
몸이 바위처럼 부드럽게 열리어
동서로 드리운 구름 가지가
바람을 실었다. 굽이굽이 긴 능선
울음을 실었다.
해지는 산 깊은 시간을 어깨에 싣고
춤 없는 춤을 추느니
말없이 말을 하느니
아, 설악산 나무
나는 너를 본 일이 없다.
전신이 거문고로 통곡하는
너의 번뇌를 들은 바 없다.
밤에 길을 떠나 우주 어느 분을
만나고 돌아오는지 본 일이 없다.
그러나 파문도 없는 밤의 허공에 홀로
절정을 노래하는
너를 보았다.
다 타고 스러진 잿빛 하늘을 딛고
거인처럼 서서 우는 너를 보았다.
너는 내 안에 있다.
- 이성선(1941~2001, 60세),「큰 노래」전문
이 작품은 90년대 초에 발표된 이성선의 「큰 노래」이다. 자연을 서정화하는 방법으로 쓰여진, 우리의 일상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의미가 있는 것은 발표된 시기와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과 관련된다. 시대가 시의 서정을 요구했을 때, 곧 작가와 독자의 새로운 경험이 요구되었을 때, 이 시는 탄생한 것이다.
그 동기야 어떠했든 새로운 서정의 모색이나 리리시즘의 회복은 독자로 하여금 서정시 본래의 영역으로 되돌아오게끔 하는 구실을 제공해주었다. 서정시에 있어서의 '은유'의 회복은 작가의 분열과 소외의 극복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 못지않게 독자의 회복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은유'는 자아와 세계 간의 대립과 갈등을 화해시켜 주는 기제가 되었을 뿐 아니라 작가와 독자 사이에 있었던 수직적이고도 일방적인 관계를 해소시켰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이다. 서정 정신의 구현을 통해 작가의 체험은 독자의 체험이 되고 독자의 체험은 역시 작가의 체험이 되는 관계가 되었다. 또한 체험의 공유지대가 넓어질수록 계몽에 의해서, 해체에 의해서 벌어진 이들의 관계망이 좁혀지게 되었다. 이러한 서정으 미학에 의해 시는 더 이상 엘리트의 근엄한 목소리를 지니지 않게 되었으며 독자로부터 달아나는 난해한 어법을 구사하지도 않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작가와 독자 사이의 체험지대의 공유야말로 서정미학이 갖는 본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5. 시와 독자의 간극과 긴장
시인은 독자를 외면할 수 없다. 독자 또한 시인의 그러한 노력을 암암리에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관계망 속에서 새로운 시들은 탄생하고 또 읽혀진다. 따라서 독자 없는 시란 존재하지 않으며, 작가 없는 시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작가와 독자는 작품을 통해서 만난다. 경험의 넓이와 깊이를 매개로 이들은 서로를 밀고 당긴다.
독자에게 다가갈수록 시는 어찌 보면 평이해지고 세속화 될 수 있다. 역으로 시가 독자에게서 멀어질수록 사적 경험의 특수성에서 시가 생산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사상성과 상업성이 개입됨으로써 전통적인 이들의 관계가 훼손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약간의 편차는 있을지라도 작가와 독자 사이에 형성된 관계란 쉽게 변질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작가의 역할과 독자의 역할은 그 나름의 고유성이 있다는 뜻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 정신일 것이다. 이를 중용의 미덕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는 작가 나름의 역할이 있고, 독자는 독자 나음의 역할이 있을 것이다. 이 둘의 관계는 보족의 관계이자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대해 균형을 해치는 관계에 놓일 수 없다는 점이다. 만약 그러한 기울기가 어느 한쪽으로 현저하게 기운다면, 그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시 본연의 모습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김윤정 저『기억을 위한 기록의 비평』, p.31~p.44) / <『리토피아』, 2014-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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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정 저『기억을 위한 기록의 비평』, 2017. 2. 28.<도서출판 박문사>펴냄
* 김윤정/ 인천 출생,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문학평론가로 활동 중이며 현재 강릉원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이고, 주요 저서로는 『김기림과 그의 세계』『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지형도』『언어의 진화를 향한 꿈』『한국 현대시와 구원의 담론』『문학비평과 시대 정신』『불확정성의 시학』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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