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사냥꾼
허만하
시는 벼랑의 질서다. 한발 헛디디면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아슬아슬한 지점까지 나는 나를 추적했다
날카로운 암벽의 끝자락에 당도한 위험한 언어가
서쪽 하늘 적막을 불꽃처럼 벌겋게
불타오르는 지점까지
세계를 그대로 얼어붙게 하는 극한까지
세계를 직접 전류처럼 느끼는 지점까지
나는 나를 추적했다
육체가 없는 추상이 육성의 탄력이 되는 전환점까지
표정이 없는 기호가 절묘한 은유가 되는 놀라는 아침까지
의미가 조용히 피를 흘리는 암살의 지점까지
언어의 결손이 언어의 사명이 되는 눈부신 반전까지
쓰는 일이 운명에 대한 유일한 저항이 되는 한계까지
나는 내 언어를 추적했다. 시는 벼랑의 질서다
위기의 벼랑 끝에 당도한 나는 쓸쓸한 수색대원이다
주제가 없는 생존의 의미를 찾는 추적자
낙동강 하구를 찾아 일직선으로 노을진 하늘을 횡단하는
한 마리 고니처럼, 새로운 자신의 문체를 쫓아
총을 메고 산으로 들어가는
최후의 사냥꾼이다
-전문, (『현대시』, 2015년 2월호)
▶ '말'의 진정성과 사회 정의正義(발췌) _ 김윤정/ 문학평론가
'시는 벼랑의 질서'라고 규정하는 그에게 시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극한의 지점에서 쓰여지는 그것은 미학적 완전성과 관련되는 것인가, 혹은 기법의 창조성과 관련되는가. 자신을 가리켜 '생존의 의미를 찾는 추적자'라고 말하는 시인에게 그것은 삶의 근원을 헤아리는 일에 해당한다. 그는 '세계를 직접 전류처럼 느끼는 지점까지' 다다르고자 한다. 영혼과 온몸을 던져 세계와 만나지 않는 자라면 이와 같은 세계와의 진정한 교감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서쪽 하늘 적막을 불꽃처럼 벌겋게 불타오르는 지점', '세계를 얼어붙게 하는 극한'은 세계에 다가서는 자아의 뜨거운 열정과 냉철함을 동시에 말하거니와, 이는 시인의 포지하는 세계를 향한 사랑의 절대성을 암시한다.그에게 세계는 단순히 인식의 대상도 향유의 대상도 아닌 바르게 사랑하는 일, 즉 진정성의 구현과 관련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진리를 추구하는 등속의 세계에 대한 책임있는 자세를 논하는 일은 오늘날 고루하게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나 그것은 분명 시인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자질이 아닐 수 없다. (……). 세계의 의미를 찾아, 그리고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고투 속에서 탄생하는 시는 시가 행해야 하는 최대한의 윤리성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세계와의 냉철한 대결과 뜨거운 사랑을 내포하는 것이자 언어에 의해 죽어가는 세계에 영혼을 부여하는 일에 해당한다. 시인에게 그것은 '자신의 문체'를 찾는 일에 해당할지도 모르겠다. 세계를 향한 사랑이 명징한 언어로 육화되는 것이란 곧 시가 '자신의 문체'로 쓰여지는 일일 터이다. 그러한 '자신의 문체'를 실현한 시인에게서 우리는 비로소 시인으로서의 자의식과 윤리성을 발견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또한 시인으로서의 윤리성을 실천하고 있는 시인에게서 우리는 척박한 세계 속에서의 진실과 희망을 엿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이 점에서 우리는 언어의 진정성을 구현하는 일이 그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진리 실현 및 사회의 정의에로까지도 확장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시에서 추구해야 할 '말'의 의미란 이와 관련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김윤정 저『기억을 위한 기록의 비평』, p.102 /p.104) / <『예술가』, 2015-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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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정 저『기억을 위한 기록의 비평』, 2017. 2. 28.<도서출판 박문사>펴냄
* 김윤정/ 인천 출생,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문학평론가로 활동 중이며 현재 강릉원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이고, 주요 저서로는 『김기림과 그의 세계』『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지형도』『언어의 진화를 향한 꿈』『한국 현대시와 구원의 담론』『문학비평과 시대 정신』『불확정성의 시학』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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