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고릴라……國家,
장석원
불빛에 잠긴 저녁의 포클레인에 대하여 나는 할 말
이 없다
녹슨 기율이나 검은 쇳덩이 혹은 인터내셔널과는
무관하기에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 자본가여 굶어 죽
어라
그건 폭력 한때 나는 그런 포르노그래피를 좋아했다
모두가 빨고 빨리고 모두가 적이 되지만
고릴라는 채혈 당한다 고릴라는 고개 꺾고 숨을 몰
아쉰다
오늘은 첫번째 그리고 세번째 겨울날
구불구불한 골목에서 불어온 바람이 먼지를 날린다
구호 요란한 노변에서 포클레인이 건물을 철거했다
부서져야 할 세계는 길 건너에 있다
커다란 회색 주먹으로 벽을 난타하는 고릴라
강철 외피와 디젤엔진이 조화롭게 파괴를 진행한다
고릴라가 가슴을 두드리며 암컷을 유혹하는 듯하다
나는 뚫리고 있는 중이다 시멘트 분말처럼 흘러내
린다
최선의 국가는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이
건설한다*
정릉 언덕의 철거 현장에서 껌을 씹으며 서 있을 때
저녁은 깊어지고 구두에 흙이 묻고 단추는 떨어진다
잠시 후 금성이 떠올랐고 포클레인은 엔진을 정지
시켰다
캐터필러를 밟고 올라 운전석에 앉는다 고릴라의
어깨 같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열린 창문으로 침입해오는 바람
무릎 꿇은 고릴라의 숨결처럼 나를 강탈하는 느린
어둠
-전문, (『태양의 연대기』, 문학과지성사, 2012)
* 플라톤의 말을 변용함
▶ 모나드에서 노마드로-프로그레시브 아나키스트의 여정(발췌) _ 장철환/ 문학평론가
철거 현장에서의 몽상은, 얼핏 1987년 이후 멜랑콜리커의 후일담처럼 보인다. 한때 '골리앗 크레인'은 저항의 상징이었다. '포클레인'은 왜 아니겠는가. 기계가 지닌 강력한 힘은 노동과 투쟁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정릉 철거 현장에서의 그것은 무엇인가? "커다란 회색 주먹으로 벽을 난타하는 고릴라". 이러한 전변 앞에서 기계를 탓하거나 그것을 파괴Luddite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문제는 '기계의 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고릴라는 채혈당한다"가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기계가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강탈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부서져야 할 세계가 '고릴라-기계'라는 노동으로부터 수혈을 받고 있는 셈이다. "길 건너"의 세계가 유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태의 심각성은 시적 주체가 "길 건너" 쪽에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곧 "나는 뚫리고 있는 중"인데, 이는 국가와 자본에 의한 파괴가 주체의 파괴와 동궤임을 보여준다.
"최선의 국가는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이 건설한다"는 이러한 사태에 대한 시적 주체의 지향이 무엇인지를 요약한다. 각주가 명시하듯, 이 구절은 플라톤의 『국가론』의 일절에서의 차용이다. 새로 건설될 이상 국가에서 시인을 추방하려는 플라톤의 기획은 시인과 철학자 사이의 오래된 싸움을 예증한다. 그렇다면 플라톤의 국가론은 이상국가라는 미명 하에 특정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인가? 소크라테스에 대한 트라시마코스의 항변은 이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그런데 정부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법률을 만들죠. 민주제는 민주제다운 법률을, 그리고 참주제는 참주제다운 법률을 만들고, 그밖에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요. 이런 법률들을 만듦에 있어서, 그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곧 의로운 것이 된다고 선언하고, 그것을 벗어난 사람은 범법자요 부정한 사람으로서 처벌을 합니다."(플라톤 저, 조우현 역, 『국가 · 시학』삼성출판사, 1988, p.38.)
플라톤이 설계한 이상 국가가 위험한 것은 처음부터 통치 불가능한 것을 배제한다는 데 있다. 이는 시인들을 비롯한 타자들을 국가 시스템 내부에 들이지 않겠다는 의지의 소산이다. 시인들이 이상 국가 내부로 들어오는 유일한 방법은 국가의 규율과 규제에 대해 자발적으로 동의할 때이다. 이것은 감시와 처벌의 내면화를 뜻한다. '판옵티콘'과 같은 감시 및 통제 시스템이 참담한 건 감시자와 피감시자 모두에게 규율 사회의 불가피성을 내면화한다는 데 있다. 이는 참혹한 일임에 틀림없으나, 그렇다고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역으로 규율화된 사회의 약점, 곧 감시 및 처벌 시스템이 타자들 ('바틀비' '노마드' '스키조이드' 등)의 틈입에 취약하다는 것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시인 추방론이 암시하는 것처럼, 고래로 시인들은 '판옵티콘'의 바깥, 곧 국가와 법이 모두 다 볼 수 없는 영역에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아나키스트 시인이 건설하는 세계는 플라톤의 『국가론』의 "길 건너"에 위치한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이 건설하는 국가이다. 그러나 이것을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 추방된 자들의 자족적 공동체라고 상상하지는 말자. 핵심은 공동체 바깥의 이상향을 내부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부에서 새로운 자치를 구현하는 것이다. 국가 시스템 내부의 통치 불가능한 것의 발견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는 주체 내부의 통치 불가능한 것의 발견과 궤를 같이한다. 이때 분노, 거부, 광기와 같은 정동affect은 국가와 자본이 전부 다 볼 수 없는 영역에 속한다. 주체 내부에서 모든 것을 보려는 자, 곧 자아일지라도 그것을 남김없이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장석원이 '사랑'이란 이름으로 다른 방식의 봄을 사유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철환 비평집 『돔덴의 시간』, p.329~331)
-------------
* 파란비평선 001『돔덴의 시간』, 2017. 2. 28.<(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펴냄
* 장철환/ 연세대학교 철학과 졸업한 후,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11년 『현대시』를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했다. 주요저서로 『김소월 시의 리듬 연구』,『영원한 시작』(공저),『이상 문학의 재인식』(공저), 『라깡 정신분석의 핵심 개념들』(공역)이 있다. 현재 연세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비평집 속의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윤정『기억을 위한 기록의 비평』(발췌)/ 임화, 박남철, 이성선 (0) | 2017.09.12 |
---|---|
김윤정_'말'의 진정성과 사회 정의正義(발췌)/ 최후의 사냥꾼 : 허만하 (0) | 2017.09.12 |
장철환_『돔덴의 시간』실재, 타자, 서정, 그리고 언어(발췌)/ 70년대産 : 진은영 (0) | 2017.07.01 |
맹문재『여성성의 시론』여성시의 꽃(발췌)/ 동백꽃 : 이주희 (0) | 2017.02.03 |
시론_모순에 대한 중단 없는 사랑을 위하여/ 정한아 (0) | 2016.08.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