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전철희_자선친필 시고/ 자화상 : 윤동주

검지 정숙자 2017. 8. 28. 20:52

 

 

    자화상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

이 불고 가을이 있읍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읍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엽서집니다.

  도로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래로 있읍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

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읍니다.

    -전문, 1939.9.

 

 

  (反) 나르시스의 우물

  윤동주를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그러나 그의 문학적 성취를 모두가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혹자는 그의 시가 나름의 미덕을 지녔어도 순수하게 예술적 가치만 따지면 대단한 것이 못 된다고 말한다. 그런 평가에는 일말의 진실이 있다. 윤동주가 한국문학의 얼굴마담이 된 것은 얼마간 그의 비극적인 생애가 뿜어내는 아우라 덕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동주의 시가 이상적인 문학의 기준에 다다르지 못한 습작품이라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물론 시가 언어를 통해 진실이나 진리를 탐구하는 예술적 형식이라 정의한다면 윤동주의 시는 살짝 아쉬운 측면도 있다. 그는 문학을 통해 '진실'이나 '진리' 같은 거창한 것들을 탐구하지 않았다. 그저 '하늘과 바람과 별'의 아름다움에 감화된 자신의 여린 내면을 정직하게 묘사했을 뿐이다.

  헌데 시로 진실을 갈구했던 문인들도 객관적 진리에 접근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보들레르나 말라르메 등의 시인은 절대적 이데아(Idea)를 갈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객관적' 진리에 다다르지 못했다. 그래서 앙드레 지드는 시인을 나르시스에 빗댔다.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투신한 나르시스가 그랬듯, 시인들은 자기 자신이 반영된 모습을 이데아라고  착각한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헌데 윤동주는 그런 종류의 시인이 아니었다. 그는 애당초 나르시스와 거리가 먼 인간형이다. 그는 우물에 비친 '한 사나이'의 모습을 마주했을 때 매혹되기는커녕 미움과 연민만을 느껴야 했다. 만약 그가 조금 더 자아도취적이었다면 의기양양하게 서정적 상념을 풀어놓았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하늘과 바람과 별'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기 전에 "하늘"을 우러러보며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고, "잎새에 이는 바람"에 괴로움을 느끼며, "별"을 보고는 죽어가는 것들에 댜한 사랑을 다짐해야만 하는 청년이었다. 그렇게 치열한 자기반성을 거친 후에야 그는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같은 서정적 문장 한 줄을 읊을 수 있었다. 「자화상」도 이런 작가의 윤리성이 드러나는 시편이다. 작품의 중심에는 자기혐오와 자기연민 사이에서 부유하는 시인의 고독이 드러나 있다. 우물과 달, 구름과 하늘, 바람과 가을이 어우러진 목가적 풍경을 그 앞과 뒤에 스치듯 지나갈 뿐이다.

  편하게 창작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만 시인이 될 수 있다면 "쉽게 쓰여진 시"를 부끄러워했던 윤동주는 시인에 미달하거나 혹은 그것을 초월한 존재였다고 해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사실이 윤동주를 한국문학사에서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남아있게 만든다. 「자화상」은 궁핌한 시대'에 고민과 반성을 거듭했던 청년의 형상이 새겨진 작품으로 읽혀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오랫동안 읽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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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산맥』2017-가을호 (기획연재 _윤동주 시인>에서

   * 전철희/ 2010년 대산대학문학상 평론 부문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