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선
양진기
범선 한 척이 건조되고 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범선의 뼈대가 세워져 있다
세로와 가로를 이어붙인 거대한 정글짐
사방을 둘러친 돛이 펄럭인다
출항 예정일은 이미 지났다
승선할 선원들은 보이지 않고
찢어진 천 사이로 텅 빈 격실의 기둥들이 빽빽하다
안전제일이란 글자가 여기저기 굴러다닌다
벽 옆구리에 뚫린 구멍에서 붉고 푸른
내장 같은 전선이 빠져나와 있다
해가 지면 범선의 갑판이 술렁거린다
몰락한 영혼들이 모여들어 격실을 채운다
종이 박스를 바닥에 깔고 누워 소주를 럼주처럼 들이킨다
가슴마다 돛을 모두 펼쳐 바람을 받는다
깊이 가라앉은 닻을 끌어올린다
출항할 시간이야, 육지에서의 삶은 불화였어
범선을 점령한 해적의 영혼들
캄캄한 난바다로 춤을 추며 떠난다
-전문-
해설> 한 문장: 냉철히 성찰해야 할 것은 2000년 대 이후 시단의 주류를 점유하고 있는 이른바 의사疑似포스트모더니즘류의 시들은 새로운 전위적 감각의 언어로 한국 시단과 독서계를 홧홧 달궈놓았으나, 한국문학의 고질적 병폐가 그렇듯이 새것 콤플렉스에 매몰되더니 각 시들의 시적 개성이 사그라든 채 겉만 번지르르하고 화려한 감각의 언어들만 부각될 뿐이다. 마치 약속이나 한 것인 양 서정시의 동일성의 원리는 한국시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로 밀려나고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시의 감각이 팽배해지더니, 그러한 시의 감각에 적당한 정치적 알리바이를 제공해줌으로써 새로운 시의 정치성이 획득되었다고 야단이다./ 여기서, 양진기의 시는 이러한 의사疑似포스트모더니즘류의 시와 명확히 거리를 둔다.(……) 폐선 한 척이 휑뎅그렁히 놓여있다. 그런데 이 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폐선이 되기까지 과정을 상상할 수 있다. "범선 한 척이 건조되"는 것에서부터 전락하여 "범선을 점령한 해적의 영혼들"만 배회하는 시공간 '사이'에서, 어쩌다 바다 위에 돛을 펄럭이지 못하게 되었는지를 헤아려본다. 아마도 범선 한 척을 건조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배를 만드는 사람뿐만 아니라 선주와 선원들은 저마다 서로 다른 부푼 꿈을 키웠을 것이다. 바다 위에 돛을 펄럭이며 바다와 한데 어우러질 운명을 받아들인 그들은 바다와 범선, 바다와 뱃사람들, 그리고 범선의 기구들 '사이'에서 때로는 투쟁하고 때로는 공존하는 관계를 형성할 것이다. 하지만, 이 범선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이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채 앙상한 폐선으로 남았다. 시인은 폐선 위의 몽환적 분위기를 통해 바다를 향해 "출항할 시간"을 맞이하는 난장을 치는 주연酒宴을 연출한다. 을씨년스런 폐선의 갑판 위, 모든 것이 쇄락하고 남루한 것들만 있는, 마치 폐허와 같은 그 황막한 곳들 '사이'에서 끝내 포기할 수 없는 바다를 향한 욕망의 춤사위가 펼쳐진다. (고명철/ 문학평론가, 광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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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신전의 몰락』에서/ 2015. 7. 31. <리토피아> 펴냄
* 양진기/ 제주 출생, 2015년『리토피아』로 등단, 막비시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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