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보르스카를 추억하며
심보선
내게는 폴란드 고모님이 있었다.
그녀는 4년 전 세상을 떴다.
장례식에도 가보지 못했다.
실은 생전에 만난 적도 없다.
나와 공통점이라곤 같은 성에 같은 돌림자를 쓰고
둘 다 사회학을 공부했고 시인이라는 사실뿐.
다, 둘 다 예언가라는 것도.
그 외의 것들은 대부분 달랐다.
성별, 언어, 성격, 국적, 문체, 정치판……
그녀의 집에는 지도와 고서,
민속 수공예품, 모던한 모자,
잉크 자국과 손때가 묻은 목재 테이블,
그 위에 깔끔히 정리된 육필 원고……
내게는 없는 것들이 가득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침묵이 있었을 것이다.
밤새 침대맡에서 뜬눈으로 그녀의 꿈을 지키고
그녀가 이침 식사를 마칠 때까지
신문의 1면과 TV의 광고 화면을 눈치껏 가려주는
그녀의 나이별 체취가 석회암 지층처럼 껴껴이 쌓인
부드러운 침묵이 그녀의 집에 거주했을 것이다.
그녀는 나처럼 잘 때 이빨을 갈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잠꼬대를 했을 수는 있다.
그것은 왠지 그녀와 어울리는 것 같다.
무수한 단어들이 그녀의 무의식을 흘러 다녔을 테니까.
하지만 이빨을 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단어들은 내 것들과 달리
증오의 맷돌에 갈려 부서진 흔적이 없다.
그녀는 내가 자신의 조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죽었다.
생전에 그 소식을 접했다면 그녀는 말했을 것이댜.
"한국에 내 조카가 있다고? 나처럼 사회학을 공부했고 시를 쓴다고?"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꽤나 흥미롭다고 여겼을 것이다.
내가 그녀의 조카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닐 때
사람들은 실없는 농담으로 흘려들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폴란드어로 씌어진 그녀의 시에는
먼 나라의 모르는 조카에게 들려주는 비밀스러운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우리의 핏줄 안에는
우리의 피부 아래에는
같은 축복과 저주가 담겨 있단다.
우리는 앎과 무지, 기쁨과 슬픔을 반죽해서 만든 빵이
시간의 선반 위에서 돌처럼 단단해지기를 기다린단다.
그것의 반은 먹고 이빨을 조심하렴 나머지 반으로는 성을 쌓는 거란다.
우기에는 빗물에 부풀어 거대한 구름으로 솟아오르고
건기에는 햇살에 부서져 드넓은 사막으로 펼쳐지는
기이하고 경이로운 성을 짓는 거란다. 물론 평생에 걸쳐서 말이야.
그리고 또 있단다.
누군가 우리의 책을 읽는다면
그들이 망각을 두려워하기 떄문이란다.
누군가 망각의 무덤에 꽃을 바친다면
그들이 착각을 사랑하기 떄문이란다.
행여나 그녀가 한국을 방문해 내가 찾아갔더라도
그녀는 나를 외면하거나 미친 사람 취급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내가 인사를 건네면 그녀는 유쾌하게 말했을 것이다.
"아하,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군요."
그녀가 정답게 내 뺨에 자신의 뺨을 맞대는 일은 없었겠지만
우리는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을 것이다.
심오한 문학적 주제에 관한 장시간의 토론은커녕
기껏해야 폴란드와 한국의 날씨나
좋아하는 도시와 배우에 대한 짧은 한담이었을지라도
그녀는 웃는 얼굴로 내게 작별을 고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폴란드로 돌아가 시를 썼을 수도 있었다.
"내게는 내가 모르는 한국 조카가 있다"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그 시가 그녀의 시집에 실린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녀가 죽은 지 4년이 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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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오늘은 잘 모르겠어』에서/ 2017. 7. 7. <(주)문학과지성사>펴냄
* 심보선/ 1970년 서울 출생, 1994년 《조선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슬픔이 없는 십오 초』『눈앞에 없는 사람』, 산문집 『그을린 예술』, '21세기 전망'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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