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모란/ 정일남

검지 정숙자 2017. 8. 4. 12:42

 

 

     모란

 

    정일남

 

 

  결혼식을 올린 지 삼 년이 지난 어느 오월

  모란이 핀 정원에 앉아 그녀와 나는

  아우의 대학등록금 때문에 사소한 다툼이 있었다

 

  그녀는 첫 마디에 거부했다, 나는 아우를 도와주면 나

중에

  우리 아이들이 커서 대학생이 되면 등록금을 대줄 게

아니오, 라고

  모란꽃 그늘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어려운 약속을 받

아냈다

 

  그 후 사 년의 세월이 지났다, 아우는 대기업에 입사했

  나는 서울로 이사를 오면서 모란을 옮겨 심었다

  그녀와의 약속을 지켜본 모란은 잘 자랐다

  세월이 더듬더듬 지나가고 우리 아이가 대학생이 되었

을 때

  아우는 꼬박꼬박 등록금을 부쳐주었다

  아우의 마음에도 모란꽃이 옮겨가 피었다

 

  지금은 아우가 지점장이 되었다

  제삿날이면 명절이면 찾아오는데

  제수씨는 올 때마다 돈 봉투를 내게 건네준다

  제수씨도 모란꽃 그늘의 약속을 아는 것 같았다

 

  모란꽃은 해마다 오월을 펼쳐 보이고 제수씨의

  마음도 모란처럼 아름답다

  지금 무덤 속에 살림 차린 그녀는 모란 그늘에 와서 소

곤거리다 가는가

  이젠 늙으신 모란 여사여

  모란꽃에는 늘 석밀 냄새가 난다

     -전문-

 

 

  저자의 산문> 한 문장: 시를 쓰는 일이 이젠 공해를 유발하는 행위라서 시를 쓰기가 두렵다. 시집詩集을 내는 일은 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시집을 내려면 그만큼 나무를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 이 시집은 많은 나무를 죽이고 간행되니 나는 살인자나 다름 없다. (…) 올바른 비평이 없는 곳에는 좋은 시도 없다. 좋은 시를 쓰고도 좋은 비평을 받지 못하는 시인들이 많다. 그들에세 힘을 실어주어야 하리라. (…) 호메로스의 실명이 오히려 쓰라린 축복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베토벤의 멀어진 귀는 오히려 정신이 더 맑아져서 사물을 더 세밀하게 보고 명작을 남기게 된 것은 아닌지 놀라게 된다. (…) 인간의 소양을 먼저 갖추는 일, 사람이 먼저 되는 길, 그것이 시인이 되는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모든 예술가에 가자를 붙이지만 유독 시인詩人은 가자를 붙이지 않고 인 자를 붙이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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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훈장』에서/ 2012. 4. 23. <詩와세세이> 펴냄

  * 정일남/ 강원도 삼척 출생, 1970년 《강원일보》신춘문예로 시, 1973년 《조선일보》신춘문예로 시조, 1980년『현대문학』으로 시 등단, 시집『어느 갱 속에서』『꿈의 노래』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