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봄, 흡혈/ 정다인

검지 정숙자 2017. 6. 9. 00:40

 

 

    봄, 흡혈

 

    정다인

 

 

  한 구의 시신 꽃잎이 진다

  가볍게 벌어진 분홍의 입술 사이로

  거머리가 기어 나오는

  봄날이 간다

 

  손을 들어 내게 그려진 잎맥을 바라본다

  더 깊은 곳을 향해 움찔거리는 빨판들이 허공을 향해 출렁거린다

  아직 빨아들일 선혈이 있다는 듯,

 

  내가 딛고 선 계단은 흰 건반일까 검은 건반일까

  단조의 호흡으로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간다

  흩날리는 꽃잎의 낙하를 가장 단정한 생의 속도라고 생각하자

  페달을 밟을 때마다 어지럼증이 도는 생을

  통통하게 살이 오른 피의 육체들이 빨아들인다

  건반 위에서 발이 떨어질 때마다 계절은

  수의처럼 나를 덮는다

  염을 하듯 서로를 핥아주는 이 지독한 어지럼증을 나는

  돌고 돈다 한 번도 눈부신 것들의 물관이 되지 못한 몸이

  뭉클뭉클 피를 게워내는 수인사를 주고받는다

 

  검은건반과 흰건반이 차례로 오르내리는 건

  숙주의 몸을 나눠 갖는 거머리의 숭고한 의식, 꽃잎이 진다

  맴을 도는 묵음의 레퀴엠

  장중하게 울려 퍼지는 계절이 나를 떠메고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내려온다

 

  목을 꺾어 생을 소지하는 봄날, 나는 어느 음역대를 헤매고 있을까

 

  눈부시다는 것 또 다른 흡혈이다

 

 

    --------------

  *『현대시』2017-5월호 <신작특집> 에서

  * 정다인/ 2015년 『시사사』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