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화분
김설희
담 구석에 화분 하나 엎어져 있다
화분은 없는데 꼭 분 모양이다
둥글 길쭉한 분에 흙보다 뿌리가 더 많다
뙤약볕에 비스듬히 누운 그것을 세우니
화초, 한 포기 말라 죽어 있다
흙이 뿌리들을 그러모은 채 딴딴하게 굳어있다
뿌리들이 흙을 안고 화석이 되어 있다
뿌리들은 침묵 중이다 돌처럼
발로 툭
그것들을 깨워본다
그것들 엉겨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분 안에서 자란 뿌리들이 가늘고 길다
아래로만 뻗어간 놈
내려가다 옆으로 가다 다시 위로 올라간 놈
화분의 둘레를 따라 둥그스름 길을 튼 놈
서로의 다리를 걸고
서로의 목을 조르고
발목이 접질리며
잔뿌리들은 아래로 몰려 옹차게 껴안고 있다
형을 벗어나지 못한 꽃 한 포기가
온몸으로 만들었던 저것
-전문-
해설> 한 문장: 시인의 눈은 본능적으로 현상을 쫓아다닌다. 현상의 추적자인 시인의 눈은 집요하고 섬세하다. 어쩌면 시를 쓰는 행위는 현상과 술래잡기를 하며 정신없이 노는 과정이라고 생각해도 좋겠다. 몽테뉴는 그의 저서 『에쎄』에서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인가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인가' 하고 묻는다. 나도 묻고 싶다 시인이 현상을 데리고 노는가? 현상이 시인을 데리고 노는가? 현상은 시인 앞에 던져진 한 마리 고양이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 둘을 구분 짓는 경계가 사라지는 지점이 시가 탄생되는 지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경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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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산이 건너오다』에서/ 2017. 4. 5. <리토피아> 펴냄
* 김설희/ 경북 상주 출생, 2014년『리토피아』로 등단, 막비시 · 현상시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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